작가의 조건 3

써야만 한다는 필요성, 중요한 말을 뒤로 미루지 않는 강인함, 절실함

by 이운

7. 써야만 한다는 필요성


일곱 번째 조건은 세 번째 조건인 ‘기록’의 연장선이다. 기록을 멈추지 않는 마음은 어떤 필요성(다른 비슷한 말로 표현하자면 의무감)에서 온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필요성을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나 강요 없이 스스로 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나는 이것이 작가의 동력이라는 개념에 가장 가까운 조건이라 생각했다. 작가를 움직이게 하는 요인은 단지 어떤 내용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씀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목표다. 즉, 작가가 글쓰기를 멈추지 않으려면 무엇을 쓰는지보다 무엇을 위해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


스테파니가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이유는 배출하기 위함이다. 그녀에게 온라인 일기장은 생명줄이고 분출구이자,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 딸과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가 배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면 사람들이 그 글을 좋아할지 아닐지, 그 글이 성공할지 아닐지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땐 그 무엇도 작가를 방해할 수 없다. 나중에는 자기 의지로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이때 필요성의 의미는 더욱 커져 ‘확신’이 된다.


반면 조앤이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이유는 추진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녀는 “추진력이란 여행에 관한 것”이라는 오해 속에서도 꿋꿋이 추진력을 유지함으로써 수시로 떠오르는 딸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딸의 유골을 안치하고 난 다음 주에 남편을 잃었을 때 쓴 책 <마술적 사고의 해>의 홍보를 위해 미국 전역을 바쁘게 오가는 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쩌면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조앤은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극본을 써서 브로드웨이용 일인극을 만드는 계획에 동의했다. 그녀의 삶은 상실의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작가로서의 커리어는 더 멀리 뻗어 나가고 있었다. 작가는 간혹 가장 중요한 감정을 외면하면서 글을 통해 치유될 기회를 놓칠 때가 있는데, 결국 조앤은 당시 자신의 오해와 회피를 언급하면서 스스로 치유했다. 그녀에게는 그 과정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8. 중요한 말을 뒤로 미루지 않는 강인함


조앤은 얼마 동안은 글이 예전처럼 써지지 않는 것을 “보다 직선적이고 싶은 소망”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생각을 바꾸어 그것이 연약함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책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그녀가 말한 연약함이란 중요한 말을 뒤로 미루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물론 조앤은 길에서 쓰러지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배달원이 자기를 밀쳐 고꾸라뜨릴 것을 두려워하고 안부를 물어오는 이들에게 “명랑한 응대”를 해야 하는 것을 “연약함의 문제”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나는 중요한 말을 뒤로 미루지 않는 강인함을 갖춰야 한다고 느꼈다. 지금 당장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나중에 쓰겠다는 말은 핑계이자 연약함의 증거다. 글을 쓰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려면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강인함이 필요하다.


하나의 두드러진 사실을 말하기까지, 주제를 사실대로 다루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에 주목하라.


조앤은 노화와 그 증거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욕구, 그리고 “순수하지 않고 불분명하고 회피적이고 죄의식이 묻어있”는 대답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을 포착했다. 그녀는 신체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강인함으로 <푸른 밤>을 탄생시켰다. 내게도 그런 부끄러움이 남아 있을까? 뒤로 미뤄둔 이야기가 있을까? 아직 미숙하고 무지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몇 년째 직업이 없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감춰왔던 이야기를 앞에서 털어놨다는 것이다. 끌어낼 수 있는 강인함을 최대한 발휘하고 나니, 내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난 이제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얼마든지 뛸 수 있다.


한편 스테파니의 좁은 집 안에는 한없이 많은 물건을 쌓아둘 만한 공간이 없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딸에게는 끊임없이 새 바지와 신발이 필요하다. 그녀는 옷과 물건들을 중고품 위탁 판매점에 가져다주고 아이가 입을 만한 괜찮은 옷으로 교환했다. 그때 그녀는 (가난이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지만) 지금이 자기 삶의 “중요한 한 페이지”라고 믿었다. 빈곤층에게 제공되는 식료품 교환 카드로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와 며칠 동안 감지 못해 떡 진 머리를 두건으로 가릴 때 느낀 수치심에 관해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글을 썼다. 그것은 분명히 작가가 지닌 강인함이다.




9. 절실함


내가 처음 인식한 스테파니와 조앤의 공통점은 둘 다 자식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작가에게 글이란 자식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계속 신경 쓰고 돌보고 충분한 영양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생명이 다해 죽어버린다. 또 자식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때로는 자신의 거처와 하는 일까지도 바꿀 각오가 되어 있다. 이처럼 작가에게도 글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가지고 있는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을 정도의 결단력과 책임감이 필요하다.


작가가 자신의 글을 대하는 태도는 부모의 역할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추측만으로는 작가를 만드는 조건을 떠올릴 수 없다. 그래서 난 조앤이 “우리가 죽음의 운명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자식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을 약간 비틀어, 작가가 죽음의 운명에 관해 말할 때 글에 관해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작가와 부모, 글과 자식, 그리고 죽음의 운명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스스로 떠올린 이 질문의 답은 죽을 각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자식을 지키듯, 작가는 죽을 각오로 글을 써야 한다. 그런 절실함이 없다면 우리는 글에 대해 논할 수 없다. 글을 쓸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스테파니는 외로움에 사무치다 온라인 데이팅 사이트에서 만난 남자의 집에 머물며 한때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꿈꿨다. 마구간에 딸린 집에서 펼쳐지는 꿈 속에는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넓은 들판과 카우보이 부츠를 신은 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두 남녀 사이에 사랑이 없었고,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기만 했다. 그 꿈에서 깨어난 스테파니는 딸에게 “엄마한테는 이걸로 충분하지 않아서 정말 미안해”라고 속삭였다. 대신 스테파니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그녀는 미줄라 대학교로 편입하기 위해 지역 전문대학에서 학위를 따야 했는데, 잠을 줄여가며 여러 개의 온라인 강의를 듣고 일을 쉬는 주말에는 공부를 했다. 그녀는 피로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학업이야말로 우리를 이곳에서 탈출시켜 줄 열쇠”라고 되뇌었다. 아이가 잘 클 거라는 것, 돈을 많이 벌어 근사한 집에 살 거라는 것은 진정한 희망이 아니었다. 진정한 희망은 죽을힘을 다해 돈과 시간을 마련하면 이룰 수 있는 작가로서의 삶이다. 생존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토대 위에 자아실현이라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일 말이다. 스테파니의 세계에는 생존과 딸을 향한 사랑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작가의 꿈이 있었다.


딸은 정말 미래와 닮았다. 그리고 스테파니가 꿈꾸는 미래에는 그녀의 글이 있다. 스테파니에게는 딸도 자식이고, 글도 자식이다. 그녀는 둘 모두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반면에 조앤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상실과 노화를 동시에 겪고 있는 그녀의 미래에는 딸도 없고, 글도 없다. 그래도 그녀의 절실함이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애쓴다. 조앤은 추진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다 결국 아파트에서 실신했다. 그 사고가 일어난 뒤로 그녀가 병원에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비상연락망을 써야 했는데, 수많은 이름을 떠올렸으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건 딸의 이름이었다. 그때 조앤은 비로소 딸의 죽음을 실감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죽음도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했다. “우리가 죽음의 운명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자식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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