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조건 2

끊임없는 글쓰기, 누군가의 작품, 침묵과 고독

by 이운

4. 끊임없는 글쓰기


이 네 번째 조건은 세 번째 조건인 ‘기록’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끊임없는 글쓰기’의 목적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창 활발하게 글을 쓰다가 오랫동안 쓰지 않았을 때 예전 상태로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다시 글을 쓰려면 글쓰기를 멈추게 했던 이유와 화해해야 하고, 잃어버렸던 언어들을 머리뿐만 아니라 손끝에 불러와야 한다. 게다가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길고 지루한 과정을 견디려면 다시 글을 쓰고 싶은 강렬한 동기도 필요하다. 이 모든 준비물을 끌어모으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끊임없이 글을 써서 최대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에 잠식되지 않고 언제든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절망 속에 갇혀 있었던 스테파니에게 계속 무너지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자기 자신의 힘을 믿고 일을 다시 시작하라고 했던 청소 업체 사장의 조언은 유용하다. 그녀조차도 아직 자신에게 힘이 남아 있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던 때에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목소리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자신에게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꼭 다른 사람이 아니어도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자기만의 글을 쓰기 위해 늘 혼자서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작가는 가만히 다른 사람의 말만 기다릴 수 없다.


조앤은 자신의 몸에 찾아온 노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과거에 장편 소설을 쓸 때 남겼던 메모를 언급하며 “글을 쓰던 당시 얼마나 편안했”고 “얼마나 쉽게 썼”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얼마나 별다른 고민 없이 쓱쓱 써내려갔”는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제 예전 같지 않다. 조앤은 코르크판에 눌러 붙인 다른 쪽지들에 대하여 “이 진짜 이야기를 그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내 연약함이 내가 더 이상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노화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젊었을 때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끊임없는 글쓰기’를 택했다.




5. 누군가의 작품


조앤은 딸이 열셋 혹은 열네 살이었을 때 “엄마에게 보여주려고 쓰고 있는 장편 소설”이라며 썼던 글의 몇 부분을 읽었다. 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자신이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담당 소아과 의사와 상담했는데, 부모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라는 의사의 충고를 따라 임신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나 주인공의 부모는 낙태 비용을 대주겠다고 한 뒤 그녀에게 “더 이상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조앤은 이 이야기에 담긴 당시 딸의 심정과 자신을 더듬어봤다. 딸은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조금도 몰랐”고, 부모는 딸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몰랐다. 입양된 아이와 그 아이를 입양한 부모는 서로를 오해했다.


이어서 조앤은 자신과 남편이 장편 소설을 썼기 때문에 딸도 장편 소설을 쓰기로 선택한 것인지, 혹은 강요된 또 하나의 의무였을지, 그것을 두려움으로 느낀 것인지, 자신과 남편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자문했다. 내가 그 질문에 감히 답변하자면, 글을 쓰는 부모가 있는 환경에서 성장하며 글쓰기를 의무처럼 느끼고 그 사실이 괴로울 수는 있어도, 아이가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은 글쓰기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앤의 딸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구를 사용해 입양아로서 느끼는 불안을 부모에게 표현하고,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난 이렇게 조앤을 위로하고 싶다.


조앤은 글을 썼고, 그녀의 딸도 글을 썼다. 그리고 딸이 쓴 글을 읽은 조앤은 <푸른 밤>을 썼다. 난 누군가의 작품이 또 다른 누군가를 자극해서 또 다른 작품이 탄생하는 현상을 목격했다. 글의 명맥이 작가에서 작가에게로 전해지며 끝없이 이어지는 장면을 봤다. 그리고 스테파니도 충분히 누군가를 자극할 수 있는 글을 쓴 작가였다. 그녀는 곰팡이로 가득한 집을 떠나 햇빛이 잘 들고 환기가 잘 되는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아파트의 집주인은 임대차 계약을 위해 스테파니와 직접 만나기 전에 블로그에서 그녀의 일기를 봤고,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녀는 “간신히 생존해 나가는 것이 어떻게 영감을 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누군가가 자기 작품을 만들 때 결과물의 효과까지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독자에게 어떤 특정한 변화가 일어나게끔 의도할 수는 있어도, 그 독자가 실제로 어떻게 해석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글의 명맥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도 예측할 수 없다. 작가에게 ‘누군가의 작품’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쩌면 매우 추상적일지도 모르겠다.


스테파니라는 작가를 자극한 작품도 있다. 그녀는 어느 주말에 책장에서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진정한 고향이라 느껴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운명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났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은 처음부터 고향에 있었다는 걸 깨닫는 주인공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자신만의 전설을 찾아 떠난다는 주제에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 메시지는 “거의 25년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살아”온 스테파니를 자극했다. 그녀는 진학하고 싶은 대학교가 있는 미줄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돈과 시간이 부족해 포기해야 했다. 그러다 장학금을 받아 일을 줄이고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자 마침내 자신의 오랜 계획을 실행했다. 그 순간에 그녀는 <연금술사>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6. 침묵과 고독


나는 고객의 삶을 지켜보는 목격자였다. 한 달에 몇 시간씩 고객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집주인들에게 스테파니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런 목소리는 오직 글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고, 금방 사라져 버리는 말보다 오랫동안 더 멀리 퍼진다. 침묵은 오히려 속으로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조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기와 똑같이 딸을 잃은 지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서로의 자식들과 그들이 남긴 기억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앤은 둘 다 그 기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아마 그들 사이의 침묵은 그 대화를 대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앤은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글로 써서 우리가 읽을 수 있게 했다.


침묵에 관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침묵하면 으레 고독에 빠진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고독이 찾아온다. 그리고 너무나 완벽한 고독 속에 있으면 관계와 대화에 갈증을 느낀다. 그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글쓰기다. 글을 쓰면서 이건 분명히 누군가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암시한다. 외로움 역시 들리지 않는 목소리고, 글은 훌륭하게 그 목소리를 대변한다. 난 그래서 침묵과 고독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이라고 본다. 우리가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눈으로 읽을 수 있도록 작가는 침묵을 지키고 고독에 빠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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