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조건 1

복선을 포착하는 예민함, 자신과 타인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는 능력, 기록

by 이운

1. 복선을 포착하는 예민함


조앤은 뉴욕에 “하지를 전후한 몇 주간에 걸쳐 해질녘 어스름이 길고 푸르러지는 시기가 찾아온다”면서 책의 제목인 ‘푸른 밤’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 파란빛이 사라질 때는 이미 해가 짧아져 여름이 떠나버린 후다. 그 무렵 조앤은 곧 한기가 몰려올 것이라 예상한다. 이를 그녀의 상황에 빗대면, 그녀는 인생의 푸른 밤이 끝나갈 때 노화와 쇠락을 감지한다. 그리고 달라진 삶과 예견된 종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계절이 온다. 난 자연의 빛과 그것의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는 그녀에게서 섬세함을 봤다. 작가는 복선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니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의 작은 틈에서도 복선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런 예민함이 섬세한 작가를 만든다.


스테파니도 그런 면모를 지녔다. “끊임없이 고객에게 조아리며 청소원으로 살아가는 삶은 일시적인 거라고 여”긴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끝날 리 없다는 확신이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살지는 않을 거”라고 끊임없이 되뇌는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한 미래를 그리고 있다. 스테파니가 이 책을 썼을 땐 이미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난 뒤였다고 해도, 과거의 그녀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꿈꾸는 미래가 이루어지리라는 복선을 포착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를 벗어날 방법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복선들을 포착하는 예민함은 의식의 영역이 아니다. 대개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이어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조건인지는 확실치 않다.




2. 자신과 타인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는 능력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어떤 이야기를 자신과 깊숙이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은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다. 실존 인물이나 가상 인물의 삶을 다룬 이야기를 볼 때 그것이 주는 의미를 자신의 삶에 투영할 수 있는지가 생산자와 소비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스테파니는 청소 일을 하면서 다양한 고객들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청소 업체 사장이 남긴 암묵적인 메모를 보며 고객이 알지 못하는 더러움까지 씻어내는 일이 청소 일의 본질임을 인식했다. 그리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고객들의 집은 염탐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그 외 고객들의 집은 마음껏 둘러보았다. 그때 집 안 곳곳에 있는 물건들은 집주인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냈고, 그녀는 “그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기계적으로 하는 청소 일이었지만”, “고객들의 연약한 면을 접하자 왜인지 나 자신의 불안감도 조금이나마 잦아들었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고 위안을 얻는 경우는 흔하지만, 그 과정 끝에 도달한 자기만의 진실을 글로 썼다면 그것은 작가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스테파니는 “단서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 이면의 증거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며 청소를 의뢰하는 집주인들의 심리까지 꿰뚫어 봤다. 이건 내가 말한 작가의 조건 9가지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작가가 갖춰야 할 아주 기본적인 능력이다. 인물의 무의식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그 어떤 인간상도 발견하지 못한다.


조앤은 스테파니와 다르게 사진을 봤다. 죽은 딸의 세례식 파티 때 찍은 사진과 소피아 로렌의 젊었을 적 결혼식 사진이었다. 그녀는 문득 파티 사진 속 여자들과 소피아 로렌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때 그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시대의 생존자 최소 한 명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소피아 로렌의 최근 사진을 찾아보지 않고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인터넷에 접속해 소피아 로렌의 이름을 검색했다. 어떤 공공 행사의 레드 카펫 위에서 노화에 아주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었던 소피아 로렌은 1934년, 조앤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자신과 같은 일흔다섯 살의 여성을 본 조앤은 “이 완전히 의미 없는 발견이 되찾은 희망으로, 되살아난 가능성의 의식으로 나를 가득 채운다”라고 표현했다. 나와 공통점이 있는 누군가를 보면 문제가 됐던 부분이 놀랍도록 말끔히 해결될 때가 있다. 그런 경험 또한 우리에게 흔하게 찾아오지만, 그때의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작가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3. 기록


기록은 일대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다. 망각은 손쉽게 우리의 정체성과 유기성을 끊어버리는데, ‘의심은 맥락을 잃었을 때 고개를 든다’고 말했던 것처럼 연속성을 잃지 않도록 삶이 끊기는 순간들에 저항해야 한다. 기록은 그에 맞설 수 있는 무기다. 스테파니가 이런 원리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성공적인 저항을 했다. 그녀는 딸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삶과 모험에 감사하며 그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기 위해 딸과의 시간을 글로 남겼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만약 그녀가 계속 상기하지 않는 이상, 힘들게 견뎠던 상황 속에서도 남겼던 인간으로서의 질문들을 차츰 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단편적인 인상으로만 남아서 지금 자신을 이루는 요소들이 그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성장하고 나면 볼 수 없는 어린 딸의 모습 또한 기록 없이는 계속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조앤도 스테파니처럼 기록을 통해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기록보다는 작품이었다. 조앤은 딸이 남긴 시를 액자에 넣어 뉴욕 아파트의 부엌 뒤 벽에 걸고 날마다 그 필체를 들여다보며 딸이 대여섯 살이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 속의 아이는 만약 자신이 미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러 정신 병원에 전화를 하거나, “스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보러 20세기 폭스사에 전화를 했다”. 조앤은 어린 나이에 이미 한 개인(혹은 어른)이 되어 있었던 딸을 당시에는 결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딸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벽에 걸린 액자에서 발견했다. 뒤늦게 딸의 메시지를 이해한 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그녀가 자신이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후회할 수 있는 것도 딸이 시 한 편을 남긴 덕분이다.


기록은 지금 보지 못하는 부분을 미래에라도 볼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를 작가의 조건과 연결하려면, 그 기록을 해석하는 작업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과거(크게 보면 역사)를 현재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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