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여전히 내가 발굴한 현실은 그 내용이 많지 않다. 가볍게 도약하기 위해 들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방금 막 내려놓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 필요하다. 떠돌기 시작해도 곧바로 어디에 정착할지 생각하게 만드는 불안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그 감정을 달래기 위해 정착할 수 있는 넓은 들판이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책 만들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책과 장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서점과 도서관에서는 카테고리별로 책을 분류한다. 글의 형식과 성격을 대중적인 개념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매대 위에 오르거나 책꽂이에 자리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독자들이 이 글을 발견할 확률은 낮아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방황하는 존재는 외부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다시 어렸을 때 허술하게 제본한 공책으로 눈을 돌리면, 작가의 영혼이 한 권의 책으로 현신한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글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역시나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이다. 난 소설이 가장 묵직하고 영광스럽다고 생각해서 오랫동안 이 장르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됐다. 일부는 불필요한 정보들과 장황한 설명들이 난무한다. 그동안 부피만 잔뜩 늘어난 내용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누군가는 효율성과 경제성이 문학성과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할 텐데, 난 곧바로 핵심을 관통하는 목소리가 더 폭넓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고 본다. 한편 어느 쪽에서는 솔직함과 투명성이 아닌 허구의 껍데기를 쓴 지지부진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들이 큰 소리로 지나가는 독자들을 호객한다. 늘 피곤하고 지쳐 있는 현대인들을 위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빠른 위로와 쾌락을 팔아넘긴다.
또한 꾸며낸 인물, 어디까지나 가짜이고 작가 자신이 아닌 인물의 뇌와 입을 빌려 생각을 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기만이다. 그리고 대변인을 앞세운 채 자신은 뒤로 빠지는 행위는 자기기만이 되어 거짓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 농도는 점점 더 짙어진다. 자아와 서사를 완벽히 분리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감이 눈에 보이면 거기서 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무언가를 가리고 숨기는 기분 나쁜 감각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현실만큼 철저한 개연성과 모순이 존재하지 않을 때 생명이 다하는 허구는 그저 한순간의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을 경멸하는 나는 이 기만적인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명쾌한 형태를 꿈꾼다. 어느새 나의 오래된 집에는 허구적 상상력은 어딘가에 버려두고 스스로 목격한 진실을 충실히 받아 적는 관찰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지만 허구가 사라진 나의 창작 세계에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는 인물은 있다. 그의 여정을 어떤 이야기로 만드는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내 머릿속에 살아있는 가상의 인물이 있다. 그는 아주 번창하는 도시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철학자다. 자유롭게 거리를 누비며 다양한 사람들과 심오한 대화를 나누고, 앞서가는 생각으로 가득 찬 곳에서 영감을 얻으며 자기만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이는 내가 원하는 관찰자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런 생활을 나도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이 들끓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앉아서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곳은 여전히 나의 오래된 집이다. 옆에는 낡은 가구와 때 묻고 겉이 벗겨진 물건들이 즐비하고, 집 주변에는 새로운 바람이 들지 않아 오래도록 방치된 것들이 많다. 간혹 이 안에 내 생각조차 갇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인상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날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바뀌는 법인데, 여기서는 이미 모두가 내 이름과 얼굴을 잘 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필연적인 운명에 내 자아가 매여 있는 기분이다. 답답함을 느끼는 이때 가상의 철학자가 살아가는 모습을 혼자서 상상해 보면 그는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안락한 가족의 품에서 벗어났어도 치열한 세계에서 혹독하게 살아남으며 거기서 의미를 찾고, 낯설고도 새로운 언어가 주는 발상의 전환을 즐기고 있을 것 같다.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은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낯선 세계로의 이동이다. 적응이라는 문제는 제쳐두고 자신이 얼마나 멀리 뻗어 나가고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현대인은 이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은 자유와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으니,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조금 더 안전한 사회와 환경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목소리가 세상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넓고 탁 트인 장소를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진정한 공간은 내면에 존재한다는 또 다른 난제에 부딪히면서 사안은 더욱 복잡해진다.
사실은 너무 익숙해서 지루해진 장소와 관계에 책임을 묻고 싶은 것이 아니냐고 자기 자신에게 따진다. 내가 새로운 생각을 하고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건 이 집 때문이야, 혹은 이곳 사람들 때문이야,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 때문이야 등등. 그런 판단은 간편하지만, 미래의 삶까지 단단하게 붙잡아 줄지는 미지수다. 결국에는 무작정 이곳을 떠나는 것 또한 안정적인 정착이 아니게 되고, 적응하고 홀로 서는 데 많은 돈을 써버려 주머니만 허전해질 수 있다.
돈 얘기가 나오니 눈앞이 더 캄캄해진다. 이곳에 계속 머물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는 난 정말 갈 곳 없는 사람인가? 눈을 떠도 미래가 캄캄해서 아예 눈을 감았다. 그랬더니 까만 화면 위에 짧았던 대학 생활 중에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가곤 했던 캠퍼스 내의 온실이 나타났다. 온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몸을 숨기기에는 적당했다. 나는 안에 있는 벤치에 앉아 한 겹 벗겨진 햇살을 맞고 있었다. 거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점이 좋아서 그 기억이 여전히 긍정적인 인상으로 남아 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겠다. 군중 속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도심 속 온실을 택할 것이다. 그 사람은 익숙함도 새로움도 아닌 고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 감각을 몰랐을 땐 내가 가야 할 길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기도 전에 어딘가로 탈출하려는 꿈부터 꿨다. 그런데 그 상태로는 터미널에 도착해도 선뜻 목적지를 정할 수가 없다. 목표 없이 섣불리 미래로 나아가는 건 더 큰 방황의 시작이다.
나는 이제 떠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난 온통 난장판인 세상 한가운데서 고요함을 찾아 그곳에 정착했고, 공간과 장르의 한계에 부딪히지 않고 독자적인 사유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이상향은 다른 어떤 세력도 침범하지 않는 내부에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할 대상은 나의 삶보다도 나의 글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상황과 여건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몸을 어디에 둘지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쓸 수 있는 글에 집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