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교육의 부작용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려면 대체로 업계가 바라는 형식 안에 자리 잡아야 하고, 합격의 공식을 익혀 흥행과 수익을 이끌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 개인에게는 그다지 선택지가 많지 않다. 다르게 말해서, 아무런 경력이 없는 창작자에게 기꺼이 투자할 사람은 별로 없으니 아마추어는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만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려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자기 증명을 통해 그 사람을 알아보고 뽑을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창작자보다 위에 군림하며 자신의 힘을 이용하는 존재들이 더욱 진정한 예술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독창성의 신화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예술뿐만 아니라 세상의 큰 줄기를 잇는 건 언제나 ‘새로움’이다. 하이에나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익 구조를 만들기 위해 독특한 것을 찾아 헤맨다. 보이지 않는 힘들이 다음 세대를 이끌 무언가를 은밀하게 지정하고 그 소식을 널리 뿌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새로움에 금세 적응해 또 다른 새로움의 출현을 기다린다. 가냘픈 아기새가 배고파서 부르짖는 소리에 어미새는 새로운 먹잇감을 사냥해 자기 자식에게 가져다준다. 사실 이 장면은 제대로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실상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실상은 이미 충분히 많이 먹어 배가 부른 아기새의 입에 어미새가 억지로 벌레를 쑤셔 넣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의 고리 안에 진정성은 어디 있는가? 이때 누군가는 진정성의 신화도 있지 않냐고 반박할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진정성이 허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원한다.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인간적인 사건과 사람들을 매일 미디어에서 만나고 있는 때에 그래도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진정성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독창성은 또한 주류와 비주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독창성을 얻으려면 비주류에 속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그런데 어떤 경향을 주류와 비주류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복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팔리는 것과 안 팔리는 것으로 나누는 어리석은 이분법의 연장선일 뿐이다. 부끄럽지만 그런 독창성의 신화에 흠뻑 젖은 채로 비주류를 쫓겠다는 것 역시 한때 나의 선택이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초보자가 따라갈 수 있는 길은 비주류의 길밖에 없는 줄 알았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는 끝내 섞이지 못한 세계보다 더 관용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오히려 더 수월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주류의 길과는 달리 한적한 비주류의 길에서 홀로 빛을 받으며 걷는 것이 막연하게 좋아 보이고, 무조건 남들과 다른 데서 오는 희열을 누리는 것도 썩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다시, 여기에 진정성은 어디 있는가? 이런 사고방식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배운 적이 없다. 공식이 아닌 삶의 원리는 오로지 혼자 힘으로만 터득할 수 있다. 그건 교육이 대신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라고 일러줄 수도 없다. 애초에 교육 자체가 그 원리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예술에 관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기술에 관한 담론이 차지한다. 이 기법은 무엇이고 여기에 쓰인 재료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렇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등등. 그 과정에서 한 명의 창작자가 펼쳐야 할 자기만의 세계는 누구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누군가의 세계는 잘못하다가는 짓밟힐 수 있다. 그 위험성을 뚫고 나가야 하는 건 온전히 한 개인의 몫이다. 제도는 한계가 분명하다.
나는 예술적 능력을 펼치는 방법을 몰랐고, 그렇다고 현실에 완벽히 적응한 것도 아니었다. 두 세계 사이의 공허에서 불안하게 떠다니며 어느 쪽으로도 들어가지 못해 양쪽 벽에 번갈아가며 머리를 부딪치기만 했다. 대학이라는 보증서도 없고, 이름값도 없고, 능력에 대한 확신도 없는 마당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상을 꿈꾸는 것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현실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이상이다.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삶과 영혼의 즙을 쭉 짜내 보기 좋은 음식에 곁들이면 조건에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상징한다.
다행히도, 한 아마추어가 성공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준비물 중 하나인 ‘보기 좋은 음식’에 관해서는 친절한 조리법부터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기성품까지 세상에 잔뜩 널렸다. 그런데 삶과 영혼의 즙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아마추어의 삶과 영혼은 기름진 음식만 탐하느라 지방만 낀 채 바싹 말라 있는데, 저녁 약속 시간은 다 되어 손님들이 도착하기 직전이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삶과 영혼의 즙을 뺀 채로 보기 좋은 음식만 식탁에 올려 대접한다. 손님들은 식사 시간 동안 자극적인 맛에 취해 즐거워한다. 그러나 음식들은 하나 같이 풍미가 없어서 이 식탁을 떠나면 아무도 그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요즘은 점점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삶과 전혀 관련이 없는 예술 그 자체만 덩그러니 남는다. 예술이 더 고상한 위치로 치켜세워질 때마다 인간의 지위는 추락한다. 인간은 한낱 재료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작품이 완성되면 버려진다. 창작자의 괴리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정반대로 돌아서서 자신이 남들과 월등히 구별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생각에 부응하지 않는 현실적인 결과들을 마주하면 세상이 나쁘고 사람들이 나쁘다는 오해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심은 맥락을 잃었을 때 고개를 든다. 그 의심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면 불씨는 다른 대상으로까지 옮겨 붙어 스스로 덩치를 키운다. 이처럼 온갖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남들과 월등히 구별되는 부분일 것이다.
사실 이 정도로 자신의 작업에 믿음이 없다면 그 분야에 재능이 없음을 뜻한다. 그래서 난 예술과 관련된 재능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결론 내렸다. 만약 지금보다 더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기를 현명하고 창의적으로 대처했더라면, 그리고 정형화된 교육이 아닌 성숙한 조언자가 있었더라면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재능이 어떻게 사춘기를 통과해 성인이 되었을 때 안정적으로 정착하는지가 관건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절망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어느 땅에나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다른 새로운 길은 분명히 있고, 그런 길에 들어선 모든 개척자가 패배의 씁쓸함만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삶이 어떻게든 굴러가듯이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도 어떤 식으로든 계속된다.
이제는 어디부터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이 아닌지 구분하는 기준을 모르겠다. 알 수 없고, 모호하다. 심지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서 원래의 정의가 오염되었다. 사실 예술의 정의는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만들었다. 세계의 밖에서 겉껍질을 뚫고 핵심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정의가 보통은 단어가 된다. 어쨌든 핵심 안에 자리한 사람들은 소수고, 그 밖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세계 안에 존재할 땐 예술의 정의를 원하는 의미로 사용할 수 없다. 정의란 사회적으로 약속된 의미이니, 차라리 혼자서 그 단어로부터 탈출하는 게 낫다. 우리는 어떤 단어는 그 의미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쓰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건 철저히 개인적인 선택, 혹은 크게 보면 낡은 의미를 폐기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해도 후대에 가서는 매우 단순해지고 범주화되어 원하지 않아도 어떤 경향이나 집단의 일원으로 기록될 것이다. 난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영역 안에 직접 들어가 살 수 없겠다고 직감했다. 제대로 정의하려면 오히려 낯설게 느껴야 한다. 마치 평생의 동반자가 어느 날 갑자기 이방인이 되는 것처럼, 난 예술이라는 개념을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는 계속 거리를 두고 살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예술을 한다는 감각을 잊어버려야 한다. 예술가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관찰자이자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나는 망가진 도구를 내려놓고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고민이 진정한 희망임을 깨달았다. 무엇을 할지 모르겠을 때 아주 미약한 조언일지라도 당장 해야 할 일을 귀띔해 주기 때문이다. 높은 이상보다 깊은 현실을 파고들게끔 해주는 새 도구가 내 손에 더 잘 맞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