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글을 쓰게 된 환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그 환경을 공간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집 안의 풍경이 가장 먼저 그려진다. 이런저런 두꺼운 책들로 가득한 책장이 곳곳에 있고, 안방 수납장 위에는 붓글씨로 적힌 시 한 편이 액자에 고이 담겨 있다. 화장실 옆 복도 바닥엔 공을 들여 그린 듯한 역동적인 수채화 그림이 놓여 있고, 가장 어린아이의 방 한쪽에는 이 집의 세 아이들이 모두 사용했던 피아노가 있다. 그리고 피아노가 놓인 자리의 반대편에는 태어난 지 1년이 되자마자 연필을 잡더니 지금까지도 놓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꽤 오래된 이 집은 다른 집과 확연히 비교될 정도로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환경이 창의적인 감각을 길러낸다는 가설이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파고들어 보자면, 열심히 글을 썼던 책상 위에서는 단순히 쓰는 작업만 이루어졌던 건 아니다. 웃기게도 난 글을 직접 쓰는 것보다 글을 쓸 수 있는 공책을 만드는 데 더 열의를 불태웠다. 서재에 몰래 숨어든 나는 두꺼운 A4 용지 더미의 포장지를 뜯어 수시로 종이를 빼돌렸다. 그렇게 은밀한 과정을 거쳐 자재를 잔뜩 획득하면 서투른 공정이 시작된다. 종이를 가위로 자르고, 칼로 자르고, 때로는 손으로 잘라 모으고는 종이가 겹쳐 있는 옆면에 하얀 목공풀을 발랐다. 그리고 학교 준비물로 쓰고 남은 파란색 부직포로 겉면을 감쌌다. 표지가 될 앞면에는 역시나 학교 준비물로 쓰고 남은 두꺼운 하늘색 종이를 작게 잘라 붙여 거기에 제목을 썼다. 허술한 제본 때문에 속지의 규격은 제멋대로였고, 목공풀이 제대로 발리지 않은 부분의 종이는 책등에 붙어있지 못하고 자주 떨어져 나갔다. 여기저기가 엉망인 책은 두께를 보면 알 수 있듯 무언가를 잔뜩 쓰고 싶은 욕심을 상징했다. 왜 욕심이라고 표현했냐면, 사실상 글은 몇 페이지 쓰지도 않고 구석에 방치한 뒤 새로운 공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부분은 똑같다. 혼자 힘으로 만든 책은 많이 갖고 싶지만, 정작 그 정도의 분량을 채울 만큼 글을 쓰지는 않는다. 난 정말 그대로 자랐다.
글을 많이 쓸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철저히 현실에서 겪은 경험만을 바탕으로 쓰니, 몇 번 쓰고 나면 더 이상 쓸 수 있는 내용이 없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어릴 때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았다. 책의 내용과 다 읽고 난 후의 감상이 또렷이 기억나는 책은 오직 한 권인 걸 보면, 정말 딱 한 권만 제대로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공식을 알지 못했다. 사실 그때 그렇게 열중해서 썼던 이야기는 문학적으로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일기였을 뿐,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실제로 무언가를 쓰기는 했다면, 적어도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상상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신비로운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기억하는 바로는 그것이 나의 첫 작품이다. 태어날 때부터 깊게 잠들지 못하는 기질로 인해 어느 날도 평소처럼 꿈을 꾸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추고 있었고, 빛이 닿는 곳의 바깥에는 기억 속에 없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얼굴은 신기하게도 꿈속에서 제대로 구현되었다. 할아버지는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빛이 계속 나를 비추고 있었을 때, 여전히 어둠 속에 서 있었던 할아버지는 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고 손짓했지만 어째서인지 점점 멀어졌다. 아무리 전력을 다해 달려도 더욱 빠르게 멀어졌다. 도달하고 싶은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슬픔,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지 못하는 슬픔은 악몽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과 함께 깨어난 나는 그 꿈에서 영감을 받아 가상의 할아버지와 손녀 간의 이야기를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에 망설임 없이 쓰기 시작했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연필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고, 할아버지는 손녀의 부모가 데려가지 못하는 장소에 손녀를 데려가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꿈을 꿨던 어린아이는 당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고 부모 외에 옆에서 지켜보며 본받을 수 있는 다른 어른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역할을 대신해 줄 가상의 어른을 창조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때의 나는 집필 활동에 엄청난 열의를 보였고, 이 이야기는 꽤 많은 분량으로 꾸준히 연재되었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은 연재를 재촉했고, 누구는 자기가 제일 먼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몰래 부탁하기도 했다. 아주 짧은 이야기 몇 줄을 담은 작은 종이 조각이 몇 명의 독자들을 거쳐 다시 작가의 손에 돌아올 때면 긍정적인 후기도 빠지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점이 좋았다든지, 다음 편이 기대된다든지 하는 평이었을 것이다. 그런 관심과 찬사는 내 글을 좋아해 주는 독자가 생기는 기쁨과 명성이 주는 쾌락을 알려주었다. 그 달콤한 감각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큰 존재감을 과시한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작은 종이를 돌려봤던 친구들 중 한 명을 만났을 땐 내가 진짜 작가가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땐 내가 잠시 작가의 길을 포기했던 시기였다. 그 친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마음대로 각색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군가가 쓴 글을 통해 그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말이 진실인가? 혹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드시 작가가 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놓고 드러나 있는 욕망을 알아채기는 너무나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난 왜 한때 그 욕망을 거부하고 글쓰기를 외면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