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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Soom Feb 01. 2022

내가 좋아했던 너는

싱거운 농담 같던 너


첫 회의에 늦었다. 내가 늦어도 될 짬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미 며칠 전부터 정해진 일정이 있었다. 약속을 잡을 때엔 이렇게 너와 다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 시작이 오늘일 줄도 몰랐고. 양해를 구하고 첫 회의만 늦기로 했지만 마음이 영 불편했다. 헤더뿐만 아니라 모든 스텝이 만나는 자리인데 하필 그날이 오늘이어서 늦을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부랴부랴 도착한 회의실, 이야기는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고 나는 조용히 스르륵 너의 옆에 앉았다. 너의 마지막 멘트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 멘트를 끝으로 점심시간을 가졌다. 식당이 꽉 차도록 많은 인원이 참석했고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해서였는지 나는 입맛이 없었다. 밥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나는 아까 적은 멘트를 다듬어 정리를 하고, 이쪽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구도 나의 늦음에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알아서 눈치를 먹어야 하는 나는 그런 짬이었고 밥이 넘어갈 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식당 안을 서성이던 차에 누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였다.


- OO 씨.


왁자지껄함에 묻혀 너의 목소리는 선명하지가 않았다. 뒤를 돌아서 널 봤다. 


- OO 씨!

- 네?

- OO 씨, 식사했어요?

- 네?


너의 의사를 명확히 알아채고 싶어서, 나는 너의 표정과 말을 살피며 되물었다. 그러자 너는 말했다.


- OO 씨, 밥 먹었냐구. 보니까 아까부터 계속 돌아다니기만 하고 아직 밥은 안 먹은 것 같던데?


그제야 너의 말을 알아들은 나는 다시 되묻듯 답했다.


- 아, 저 밥 먹었냐구요?


그런데 너는 나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피더니 씨익 웃었다. 그리곤,


- 농담이에요.


하고선 곧 다른 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농담이라니, 이게 무슨 앞뒤 안 맞는 말일까? 참 엉뚱하네, 하는 찰나에 너를 중심으로 모든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흘러간다. 갑자기 중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내 마음은 붕 뜨고 머리는 망치로 꽝 얻어맞은 것 같다.


'맞다, 나 이래서 널 좋아했었지.'


농담일 리 없는 말을 농담이라고, 싱겁게 말을 마무리하는 너. 정말 오랜만에 보는 너는 여전히 딱히 멋져 보이는 외양은 아니다. 후줄근하고 마른 사람. 한결같은 옷과 머리 스타일. 웃을 때면 더없이 순박해지는 얼굴. 그 순박한 얼굴이 순간 야속해진다. 너를 중심으로 느려진 장면에다 이제는 달달한 배경음악까지 흘러나온다. 못 살아, 이게 뭐야? 갑자기 웬 음악까지! 무슨 드라마야? 하는 순간, 나는 이 꿈에서 깼다.


뜬금없는 꿈... 여운이 깊었다. 그래 맞아, 나는 너를 좋아했다. 그 마음을 잊은 채 지낸 것도 아주 오래다. 내가 그랬었나 싶을 만큼.


농담이라니, 그래 내가 좋아했던 너는 그런 사람이었지.


내가 밥을 먹었는지 먼저 물어봐주고, 또 혹시나 밥을 먹었냐는 말조차 상대에겐 꾸지람이 될까 내 곤란한 표정을 살피고 씩 웃으며 농담이라는 시답잖은 말을 덧붙이는 그런 사람. 


너는 모두의 헤더였고, 나는 모두 중에서도 가장 아랫사람이었으니까 네가 나에게 이상한 곤조를 부리거나 속된 말로 지랄을 떨어도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을 그런 부조리한 판 속에서 너는, 나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너의 위치나 힘으로 수직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자기가 가진 힘이 어떨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타인이 느낄 수도 있는 불편한 마음들을 몇 수 앞서 헤아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앞뒤가 맞지도 않게, 씨익 웃곤 농담이라는 말 한마디로 상황을 수평으로 만들어버리는 세심하고 따듯한 사람.


조금 더 어른이 되고서 오늘에야 생각해보면 너 같은 어른이 세상에 많아야 하는 게 정상인 것 같은데... 조금 더 어른이 되고서 오늘에야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게 세상이고 그걸 탓하기엔 생각보다 세상도 사람도 복잡하더라.


그럼에도 그런 사람이었던 너를 나는 꽤 깊게 좋아했나 보다.

오래 모두 잊고 지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꿈에서 만날 만큼.

아니면, 그런 세심함과 따듯함이 조금은 그리웠나 보다.


욕심인 거 알지만, 너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늙어가기를 바라본다.

이것도 욕심인 거 알지만, 네가 아프지 말고 어디서든 기쁘게 살아가길 빌어본다.





꿈에서 순간 배경음악으로 깔렸던 음악

그대의 고요 - 심규선

https://youtu.be/xT1e2O4D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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