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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Soom Feb 07. 2022

그 서점엘 가면

나는 문득 슬퍼진다

우리 집이 망했다. 정확하게는 아빠가 하던 사업이 망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를 몹시 좋아하는 초딩이었다. 얼마 전엔 가장 친하게 지내던, '베스트 프렌드' 3명과 함께  대형 서점에 해리포터의 부록으로 나온 곁가지 책을 사러 갔었다. 친구들과 대형 서점 쇼핑이라니, 겨울 방학이었고  중학생이 되면 뿔뿔이 흩어질 운명에 처한 우리들은 어찌 되었든 지금은 함께  해도 즐겁기만 했다.


그날 마냥 신이 나서 책 두 권을 홀랑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확인을 해보니 책 상태가 불량이었다. 제대로 인쇄되지 않은 면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소심한 초딩이었던 나는 이걸 어찌해야 하나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엄마는 얼른 가서 교환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다시 친구들과 그 먼 서점까지 가자는 약속을 잡기는 어려웠다.


그 무렵 아빠는 낮에도 집에 계셨다. 주말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런 아빠는 흔쾌히 어린 딸과 함께 그 서점에 가주기로 약속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아빠와 아마도 내 인생 처음으로 단둘이서 그렇게 멀리까지 외출했다. 나는 여전히 속 없는 강아지처럼 신이 나 있었다. 아빠가 나를 위해서 멀리 있는 서점엘 함께 가준다는 게 그냥 좋았다. 평소에 엄청 무뚝뚝하시거나, 나와 보낸 시간이 무척 적었다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근데도 그게 그렇게 좋았다.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면서 아빠는 말했다.


- OO아, 중학교 들어가면은 여기까지 자전거 타고 다녀야겠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지만, 배정받은 중학교는 걸어서 등교하기엔 제법 먼 거리에 있었다.


- 아빠가 자전거 알려줄게. 너 잘 탈 수 있겠어?


나는 헤헤거리며 뭐라 답을 해댔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빠의 말,


- 그런데 학교가 너무 멀지 않아? 시골 내려가면은 학교 멀리까지 안 다녀도 돼.


우리는 곧 아빠의 고향인 어느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갈 참이었다. 나는 이미 배정받은 서울의 모 중학교에 교과서를 받으러 갔다가, 전학 신청을 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어깨가 무겁게 책을 한가득 매고서 돌아갔지만 내 어깨는 가벼웠다. 집이 망했다는 건 남들과는 뭔가가 자꾸만 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제는 사는 곳도 달라질 참이었다.


그날 아빠는 서점에 도착해, 쭈뼛거리는 날 대신해 책을 바꿔주고 무게를 달아서 파는 신기한 젤리들도 사주었다. 그 젤리들이 너무 아까워서 냉장고 속에 넣어두고선 어쩌다 한 개씩 꺼내 먹었다. 이사를 갈 때, 그 젤리들을 챙기지 못했다. 오랫동안 두고두고 생각이 났다.


고작 열두 해를 산 나였지만, 내 평생의 집이었던 동네를 떠난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난생처음 겪는 이별이었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온 감각으로 경험했다. 아빠도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나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아니 사실 가족 중 누구도 귀향이라는 선택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지금도 그 서점엘 가면 그날의 공기가 또렷해진다. '그런데 학교가 너무 멀지 않아? 시골 내려가면은 학교 멀리까지 안 다녀도 돼.' 말하던 아빠의 가슴에 숨겨진 좌절이 저릿하게 나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나는 그날, 슬픔은 울음이 아닌 다른 소리로도 전달될 수 있음을 배웠다. 지금도 그 서점엘 가면 나는 문득 슬퍼진다.


다 큰 내가 이 도시에 다시 움을 틔우면서 쌓은 정도 많지만 가끔은 하루하루가 짐짝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야 겨우 가늠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제법 젊던 아빠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한 학기 동안 배울 교과서를 무식하게 하루 만에 다 나눠줘서 낑낑대며 매고 와야 했을 덜 자란 여학생들의 어깨만큼, 무거웠을까?


삶에 부쳐서 숨이 턱 막힐 때면 슬픔을 숨기며 내게 말을 걸던 오래전 그날, 아빠의 목소리를 상상한다.


그렇게 씩씩하고 다정하게, 슬퍼도


살아가야 함을 배웠다.




산책 - 소히

https://youtu.be/w_Pvh0-eOh4

출처: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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