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참견, 정(情)
깨끗이 빤 빨래에 바깥바람이 깃들면 포근한 엄마 냄새가 난다. 땅바닥에 딱 붙어 있는 나의 방엔 엄마 냄새로 마르는 빨래가 없었다. 볕도 바람도 넉넉지 않은 공간이다. 자주 걸었다. 몸에 바깥바람이 깃들면 나도 잘 마른빨래처럼 포근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여.
어느덧 햇수를 손가락으로 짚어 볼 시간만큼 동안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동네가 내어준 등허리를 꼼꼼히 밟고 다니며 어느 곳 하나 온전히 내 소유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집 마당 마냥 이곳을 잘 알게 되고 아끼게 되었다. 그렇게 걷고 걸으면서 가난해도 포근하고 풍요로운 마음을 얻었다.
내 영혼이 포근한 바람을 쐬고 와도 방 안 빨래는 여전히 아쉽게 마르고 있었고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문 앞에 빨랫대를 펼쳐 널기 시작했다.
나는 철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나오는 1층 첫 집에 살고 있었고 철문이 있긴 하나 1층의 복도는 야외나 다름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원룸이나 빌라 건물에도 공동현관이 다 생긴 요즘 세상이지만 서울 구석구석엔 별의별 형태의 집이 다 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 이사를 왔을 땐 도어록도 안 달린 열쇠 문이었으니... 1층 맨 앞 집이라 오가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내 옷가지를 구경시켜준다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날 좋은 날 몇 시간만 바깥에 널어둬도 완전히 다르게 마른 빨래의 감촉과 온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바깥에 빨래 널기 가장 적기인 봄이 왔다. 얼마 전부터 쉬는 날이면 부지런히 세탁기를 돌리고 문 앞 복도에 널어두었다. 봄바람을 먹은 옷가지를 거둬드리면 행복해진다. 빨래 만족도가 오르는 계절이다. 물론 가볍거나 부드러운 소재의 옷은 어느새 바닥에 툭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탁탁 몇 번 털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어제 걷지 못한 빨랫가지 군데군데에 못 보던 빨래집게가 집혀 있었다. 나에겐 없는 아이템인데? 빨.래.집.게.
내 옆 옆 집엔 이 건물 주인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할머니의 딸과 가족들이 작년에 이사를 와 꼭대기 층에 살고 있지만 할머닌 다리가 아프셔서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드시니 1층 집에 계속 계셨다.
할머니는 가끔 만두나 떡볶이 같은 음식을 나누어주셨다. 어떤 날엔 여자 혼자 살기 힘들죠? 묻기도 하셨고 우리 집 강아지 먹으라고 소시지를 내미신 적도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이 알진 않았지만 적당히 가까운 이웃이었다. 할머니의 어떤 질문이나 나눔들은 참견이 되기도 했지만 그 속의 다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웃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가 내 맘 구석을 든든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빨래집게를 본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가 집엔 날 반기는 반려 동물이 세 마리나 있었지만 하루에 치인 날엔 누구라도 마중 나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그런데 그날은 할머니의 빨래집게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내 빨래에 툭툭 집게를 집어 놓는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그 무서운 것, 정(情). 때문에 나는 미소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정(情)은 관심과 오지랖이 적당하게 뒤섞인,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을 견뎌낸 사람의 든든한 기운으로 다가와 내 마음에 차올랐다. 해도 잘 안 드는 작은 방에 사는 이웃집 젊은 여자가 어떻게든 빨래에 바람을 맞혀보겠다고 애쓰는 그 마음 안에 담긴 작은 서글픔을 할머니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신 걸까.
빨래를 걷어 정리하고서 빨래집게는 모아서 할머니 집 앞 화분 옆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할머니는 그 집게들, 나 쓰라는 듯이 우리 집 현관문 옆 작은 창문가에 다시 올려두셨다. 한 번 더 웃게 된다. 나는 이런 참견이 좋다.
가난해도 맘이 풍요롭고 포근해질 수 있는 건 동네의 구석구석을 알게 된 시간만큼 이곳에서 나눈 마음들이 있어서다. 어쩌면 나는 이 동네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알면 알수록 좋아진다는 게 사랑의 증거 아닌가. 내 이러함엔 이웃집 할머니의 참견이 적지 않는 몫을 한다.
나는 자꾸 잘 마른빨래처럼 기분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