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만남에 기꺼워하며
얼마 전 나와 또래인 지인들을 만나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공감할 수 있는 여러 키워드가 튀어나왔고 얼마나 고갤 끄덕였는지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귀가 솔깃했던 이야기는 "좋게 나이 들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내 인생 롤모델이다. 그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그때마다 실로 인간적인 고뇌를 하며 끝내 더 사랑을 실천하는 쪽의 결정을 선택한다. 이야기의 말미, 그가 인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그는 사랑을 좇아 살다가 사랑을 완성해 낸 삶의 주인공이 된다.
그에게 내가 매료되었던 것은 완성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실수와 실패, 고난 앞의 고뇌들이 너무나 인간적이라서. 그럼에도 힘겹게 한걸음을 더 나아가는 사람이어서.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살면 살수록 나 스스로 체감하고 있어서다. 나는 장발장처럼 "좋게 나이 들 수 있을까?"
이곳에 공개글을 남긴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만큼 삶이 바빴다고 하면 핑계일까. 바쁘기도 했거니와 고백하자면, 글 속에 내 마음을 덜어내고 싶을 만큼 흔들리는 순간들이 줄어서이기도 하다. 그간 나는 견고해졌다.
그래, 견고해졌다.
견고한 내가 제법 맘에 들었다. 근데 동시에 이런 내가 두려워졌다. 이대로의 내가, 여기까지의 내가, 내가 될 수 있는 최정점의 나일까 봐. 고작 여기까지인 내가, 전부일까 봐. "좋게 나이 들 수 있을까?" 그러려면 장발장처럼 삶의 다양한 곡선을 겪으며 부단히 달라져야 할 텐데. 놀랍도록 평화로운 지금의 내가, 인생을 전부 손에 넣은 양 자기만족에 머무를까 두려움이 몰려왔다.
만남이 필요하다.
견고함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는 해내기가 어려운 일일지 모르겠다. 그것이 견고하면 할수록 더 어렵고,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엔 늘 타자가 필요하다. 나의 견고함을 무심하게, 천진하게, 신이 나게 무너뜨리는 나 외의 존재.
최근에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을 만났다.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는 원활하고 흥미로웠으나 대화의 끝에 도달하는 지점은 서로 늘 달랐다. 그리고 그와의 대화 끝에 나는 자꾸만 내 삶의 지향점을 해 집어보게 된다.
지금까지 나를 단단하게 연결하고 있던 끈이 뭐지? 나의 신념은 어디에서 비롯 됐지? 신념과 고집의 차이는 뭐지? 난 무엇을 기준으로 옳고 그르다 결론짓고 있지? 자꾸만 이런 질문들이 견고히 쌓아 올렸던 나를 뒤흔든다.
흔들림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견고한 채로 고착화될 나 자신이 두려웠던 나에게 이 흔들림은 그토록 기다려온 파도가 아니었나?
타자가 불러온 파도가 내게 자꾸만 말을 걸어온다.
너는 누구니
너는 어떤 사람이니
너는 어떤 사람이 될 거니
그럼 나는 나에게 되묻는다.
나는 누굴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을까
예전에는 나일 먹으면 이런 것쯤엔 자신 있고 명확하게 답을 읊게 될 것이고, 그게 멋있는 일이라 동경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어제까지 정해놓은 답안지에 줄을 쫙쫙 긋는다. 두렵지만, 약간은 신이 난 채로.
이제 내 답안지에 기꺼이 새롭고 불완전한 답을 적어 보고 싶다. 나 혼자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새로운 답을. 그러기 위해 언제나, 만나야 한다. 너를.
장발장은 여러 타자를 만났다. 용서와 자비를 알게 해 준 신부님, 이타심을 일깨운 판틴, 순수한 사랑을 가르쳐준 코제트, 숙적이지만 오히려 자비를 완성하게 했던 자베르까지. 그는 만나며 변화했다. 자기 자신의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좋게 나이 들 수 있을까? “
이 질문에 유일히 고정된 정답은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 안에 있다.
흔들림 속에 있다.
기꺼이 흔들리자.
레미제라블 에필로그
https://youtu.be/hiVPW4tenyU?si=HqeVqKXggelP0y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