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둘째가 방과 후 수업에서 사슴벌레를 데려왔다.
그렇게 사슴벌레는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다.
늘 그렇듯 아이들은 초반에만 반짝 관심을 보이다 서서히 관심을 잃어간다.
분명 본인들이 엄청 관리를 열심히 할 거라 하여 학교에서 데려오는 것을 허락했건만.
그때부터 나의 내적 갈등은 시작된다.
아이들의 무관심을 그대로 방관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적극적으로 돌볼 것인가.
아이들의 무관심을 그냥 지켜보게 되면, 사슴벌레는 곧 죽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생명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되고, 다음에 생명을 들일 때 조금 더 신중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의 목적으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자니 내 마음이 너무 죄스럽다.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돌보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엄마가 돌보겠거니 하며 더욱더 무관심해진다.
그리고 생명을 들이는 것에 신중해지지 못하고 앞으로 자꾸자꾸 데려올 것이고 나의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엄만 이제 신경 안 쓸 거라며,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진짜 신경 안 쓰는 건 아이들인걸 알기에 아이의 방을 오가며 사슴벌레의 먹이인 곤충 젤리의 양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점점 내가 사슴벌레의 밥을 넣어주는 날이 늘어났다.
그렇게 1년 반을 키웠다. 녀석의 평균 수명에 가까워 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사슴벌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졌다.
자꾸 뒤집어지는 것이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보였다.
점점 생명의 징후가 사그라들다 마침내 손으로 만져도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첫째 아이가 사슴벌레가 죽었다며, 큰절을 두 번 하자 했다.
저녁밥을 하다 말고 곤충에게도 예는 갖추자는 생각에 흔쾌히 사슴벌레 사육통 앞에 섰다.
첫 번째 절
아이들과 나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절을 하였고 우리의 이런 모습이 우스워 킥킥 웃었다.
두 번째 절
엎드렸던 큰아이가 일어나질 못했다. 엎드린 채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사슴벌레야 미안해. 내가 잘 돌보지 못해서 죽은 것 같아 너무 미안해.
다음엔 나 같은 애 만나지 말고 더 착한 아이 만나. 엉엉엉.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화딱지가 나기도 한다.
웃으려다 말고, 화내려다 말고 감정은 배제한 채 저녁밥을 마저 하며 무심하게 한 마디 했다.
엄마가 너희에게 생명을 키우는 걸 신중하게 하라는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어쩌면 나는 이기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슴벌레가 갈 때가 된 것 같을 때 나는 더욱 열심히 밥을 넣어 주었다.
사슴벌레가 우리가 돌봐주지 않아서 죽었다면 죄책감이 들 것 같아서 돌보았던 걸까.
아니면 사슴벌레 자체를 소중히 여겨 돌보았던 걸까.
그런데, 죄책감 때문에라도 돌보았다면 그게 나쁜 걸까. 그렇게라도 돌본 게 다행은 아닐까.
아니, 진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작은 통에 가둬 키우는 일을 애초에 하질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을 하고 있는 듯하다.
뒤돌아 밥을 하다 생각하니 첫째 아이의 눈물은 헤어짐의 슬픔보다, 죄책감이 더 큰듯했다.
우리 집에서 반려 곤충으로의 삶이 아닌, 성실성 혹은 책임감의 지표처럼 살다 간 녀석이 안쓰러웠다.
경험하면 할수록 생명을 들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님을 느낀다.
그곳에선 곤충 젤리가 아닌 진짜 참나무 수액을 먹으며 자유롭게 날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