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꼭 이 날의 기억부터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극 안정주의 졸 인트로벌트(Very introvert)인 제게 인생 첫 퇴사는 엄청나게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약 2달 전 일이지만 아직도 그 날의 감정과 디테일이 생생합니다. 제 인생의 어느 순간 중 어떤 마무리였던 퇴사 날에 대한 기억을 '시작'으로 도장 꾹 찍고 서명(signature)하고 싶었습니다.
살다보니 내게도 이런 날이 왔다.
정말로 내가 퇴사할 지는 몰랐다. 그래 물론 가끔은 생각했다.
어느 날은 이웃 회사에서 내 옆구리 꾹꾹 찌를 때도 있었고, 물론 내가 찌를 때도 있었고(이런 저런 이유로 잘 안됐다. 언제 한번은 예전에 같이 일하던 진짜 실력, 인성 꼴같지도 않은 인간이 거기 팀장이라고 내 앞에 앉아있더라.)
꼴도 보기 싫은 인간들 지긋지긋해서 분노로 너덜너덜해질 때도 있었고,
누구누구 회사 그만두고 더 잘나간다더라. 얘기를 들을 때면 마음 속 자격지심으로 질투와 짜증으로 괜한 트집 잡을 때도 있었고,
지금보다 돈 좀 더 벌었으면 했고,(많이는 아니고, 그냥 지금만큼만 내 일만 하면서+ 플렉서블 타임 지켜가면서+ 일한만큼만 받으면서+ 거기에 한 100만원 정도만 더 받았으면 했다. Yeah. In your dreams.)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 회사는 그냥 포근했다.(이건 물론 대단한 착각이겠지만)
14년차 디자이너로서 그냥 막 회사는 편안했고, 현실은 살만했다.(돌아가는 꼴 다 알고나니, 편할 수 밖에)
퇴사의 이유는 운이 좋았다고,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다. 마침 여러가지 이벤트들이 겹쳤다. 그래서 결정했다. 누구는 순간적이라고 다시 생각하라고 말했지만, 전혀 순간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그저 그 날이 빠른 시일 내에 실제로 올 거라고 상상을 못했을 뿐이다.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퇴사'라는 기회에 대한, 나. 본인이 내린 단단하고 자신감있는 결정이고 도전이었다.
그리고 퇴사 뒤, 약 3주 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퇴사해보니, 의외로 내가 그렇게 좁마인드는 아닌 것 같다. 막 불안할 줄 알았던 퇴사 후의 삶은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막상 해보니 뭐 별거 없네 싶고. 뭔 자신감인지 의외로 하루하루 엑기스 짜가며 놀며 즐긴다. (아무래도 아직 쫄리는 현타 올 시기는 아닌가보다.) 잠도 많이 자고, 어느 날은 3번에 걸쳐 자다 깨다 자다 먹다, 다시 잠만 잤다. 건강 앤 미모 따윈 개나 줘버려.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주로 육식, 여행도 가고,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뿌듯하고 재미있고, 그래도 나이가 있는지라 가끔 수영도 하고 헬스도 좀 하고, 어제는 프로틴도 좋은 것으로 하나 샀다.
퇴사 후의 내 삶은 대충 이러하다.
잘 먹고 잘 놀고, 이제는 하고싶은 거 위주로 좀 할래요.
살면서 하고싶은 것만 하지 못하는 것 되게 잘 안다. 그래서 대부분 그 위주로 하겠다고. 근데 하고싶은 거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으니, 그나마 좋아하는 글쓰기를 시작으로 뭔가 다시 해보겠다고.
일단 지르면서, 열심히 말고 그냥 적당히 사는 삶. 퇴사 후의 삶. 바로 이것이로소이다.
언젠가는 또 회사라는 곳에 들어가겠지만(물론 장담은 못한다.) 난생 처음 퇴사 한번 맛본 나는 이전과는 조금은 다를 것 같다는 막강한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