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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Oct 07. 2018

 꼰대어 해석하기@사회초년생

'광고, 홍보'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고, 애니메이션이 현란하게 들어간 PT로 광고를 따오는 그런 커리어우먼이 될 줄 알았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 택한 회사는 바로 서울 중심지에 있었던 광고홍보대행사. 국내, 해외 대기업을 홍보, 광고하는 회사. 회사 안은 대리석으로 반짝거렸고, 유명 잡지들이 즐비했다. 백화점에서 볼법한 제품들이 아무렇지 않게 회사 창고에 쌓여있었다. 여기다. 내가 원하던 곳.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사회에서 만난 나의 첫 사수. 나에게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다. 돈 벌기가 이렇게 힘들다. 똑똑히 알아둬.'를 알려준 그녀. 내 상사는 에너지가 굉장히 넘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다이렉트로 할 수 있는 말을 이리저리 요리조리 마구 돌려 '자 이제 내 말뜻을 알아맞혀 봐.'하는 사람이었으니. 이런 류의 사람을 처음 만난 나로서는 처음에 뭣도 모르고 사수를 잘 만났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나를 정말 생각해주는 사람이야. 내 미래를 위해서 사소한 부분도 세세하게 짚고 넘어가 주는 정말 좋은 상사를 만났어."라며. 그렇게 2달 정도가 지난 뒤 점점 내 얼굴은 흙빛이 되어가더니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작 주변 상황에, 사람들에 우리의 근사한 점을 놓치지는 말아요. / 영화 i feel pretty


번역기에도 나오지 않는 그녀의 말을 해석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절을 경험하고 어느 정도의 대응법을 찾은 난 이제는 실제로 그녀의 메신저 내용을 인용해 '꼰대어 해석하기'를 해볼 작정이다.




꼰대어1.

"네 나이를 생각해서, 네 미래가 걱정돼서 해주는 말이야.

  다. 널. 위. 해. 서."


26살이 되던 해에 첫 직장, 첫 정직원이 되었다. 누구에겐 적은 나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겐 적지 않은 나이기도 하다. 내 상사는 26살이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날은 본사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유독 가운데 정렬, 글꼴 및 글자 크기 및 서식 및 글자색 통일을 중요시했다. 이 통일감을 몇 번 깨뜨린 나는 이미 상사에게 몇 번이나 지적을 받았다. 보고서를 쓸 땐 꼭 스스로에게 말했다. '가운데 정렬, 글꼴, 글자 크기' 그날도 상사에게 보고서를 넘기기 전에 몇 번이고 확인했었다. '가운데 정렬, 글꼴, 글자 크기' PPT 40장 분량의 보고서 중에 2~3개의 통일성 파괴가 나타나던 날이다.


호출이 왔다.


"내 자리로 좀 와볼래?"

그녀의 자리로 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피드백을 기다렸다. 그녀는 말했다. "몇 번을 말했어.. 여기는 검은색 글자색. 이 마침표는 남색이잖아.." 아차 싶은 나는 분명 렌즈를 끼고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 왜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하며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네가 지금 들어온 지도 2주가 지났어. 네 나이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건데 이런 사소한 실수는 하지 않도록 하자.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커리어도 뚝뚝 끊기고 짧은 것도 고려해야 할 나이지 않아? 여기서는 오래 일해야지."라고 말했다.


내 미래를 위해서 해주는 조언들은 곧 "네가 실수하면 앞으로 내가 번거로워지니까 웬만한 일들은 네 선에서 완벽하게 끝내. 나 일하기 싫단 말이야."라는 말이었다.


꼰대어2.

"휴가 편하게 써. 내 눈치, 회사 눈치 보지 말고."


그녀는 "회사 눈치 보지 마. 절대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 꼰대 스타일이니까. 휴가 같은 것도 네가 쓰고 싶을 때, 꼭 쓰고.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 거 알지? 눈치 보지 말고 꼭 써."라고 했다. 분명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여름휴가 한 달 전부터 굉장히 들떠있는 상태였고, 난 그녀의 휴가 계획을 귀에 딱지가 들어앉을 정도로 들었다. 그리고 난 고심 끝에 여름휴가 5일 중 2일을 휴가로 쓰기로 했다. 분명 눈치 보지 말고 휴가를 쓰라고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휴가를 공표하고 난 그다음 날부터 그녀의 여러 질문이 나를 압박해왔다. "누구랑 가기로 했어. 내가 신입일 때는 그렇게 휴가를 못 썼던 것 같은데.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나 봐. 제안서가 이렇게 들어왔는데, 이 일은 너 없이 나 혼자 해야겠네.."꼰대어임을 감지하지 못했던 나는 어쩌면 눈치 없이 휴가를 갔다.


휴가 중 어김없이 호출이 왔다. "우리 제안서가 마무리 안 되어서 주말에 일하기로 했어."


카톡을 받자마자 남은 여행 내내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나 때문에 회사 일이 지연되었다는 생각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주말에도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눈치 보지 말고 휴가 쓰라는 말은 "휴가 쓰는 동안 내 일이 많아지니까 눈치껏 넌 휴가 가지 마."였다.

우리, 쓰러져도 꿋꿋하게 계속 자라나요.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꼰대어3.

"보고서 내일 오전까지 줄 수 있지? 야근은 절대 하지 마."


보고서를 쓰다 보면 제안서가, 제안서를 쓰다 보면 보고서가 치고 들어왔다. 이런 환장의 짝꿍아. 사람 환장하게 했던 하루하루. 거기에 영수증 처리 같은 자질구레한 일들을 쳐내다 보면 내 이름을 까먹을 정도로 정신이 없다. 일주일 중 3~4일은 10시, 어떨 때는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하던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고, 내 상사는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금 하는 일, 내일 오전까지 줄 수 있지? 야근은 절대 하지 마. 야근은 꼭 필요할 때 하는 거니까." 대체 이 앞뒤 안 맞는 말은 무엇. 그녀는 이 말을 툭 던지고 쌩-하고 퇴근해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어떤 말을 믿어야 할까.


처음에는 내일 오전이면 점심시간 전에만 상사가 보도록 주면 되니까 내일 조금 일찍 와서 처리하자. 하고, 퇴근했다. 그다음 날 그녀는 싸늘해진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네가 오전까지 보고서를 해놔야 내가 그다음에 체크해서 점심시간 이전에 보고하지. 다 안 해놓고 집에 갔어?"


그녀의 "야근하지 마."는 "난 피곤해서 집 갈 테니까, 남은 일은 오늘 야근해서라도 다 끝내고 가."였다.


꼰대어4.

"근데, 옆 팀에 그 사람 좀 별로인 것 같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해?"


옆 팀 직원 중 한 명은 본인의 일이 끝나면 정시에 퇴근했다. 무미건조한 얼굴로 인사를 하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상사가 야근해도 스르륵. 떠나버렸다. 하루는 내 상사와 함께 퇴근하던 날, 옆 팀의 동료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 친구 좀 별로인 것 같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자기 할 일 다 했다고 땡-하면 퇴근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필터링이 없던 시절의 나는 "자기 할 일만 제대로 끝나면 일찍 가도 괜찮은 거 아닌가요? 할 일을 다 끝내고 가는 건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웃음)" 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내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했던 나는 "센스 없다. 눈치 없다. 사회생활 못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녀의 "넌 어떻게 생각해?"는 "네 생각을 묻는 게 아니야. 내가 누구를 욕하든 무조건 내 편들어. 맞장구치라고!"라는 말이었으니.


꼰대어5.

"이 반찬 맛있다."


점심을 먹으러 갔다. 기본 반찬이 세팅되었고, 그녀는 메인 메뉴보다 사이드 반찬들을 참 좋아했다. 반찬들을 어찌나 그렇게 싹 비우는지. 제발 메인 음식이나 드세요. 자기가 먹고 싶으면 식당 이모님께 먼저 말하겠지. 하고 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절대로! 반찬을 먹고 싶더라도! 본인의 입으로!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반찬 맛있다."라고만 한다. 난 당연히 그 반찬이 먹고 싶지 않았으니 먼저 시키지 않았다.

자잘한 나의 잘못들을 모아서 혼나던 날. 점심시간 '나의 태도'가 이유였다. 그것도 다른 직원과 비교하면서. "저 친구 좀 봐. 점심시간에 반찬 떨어지면 바로 채우고, 얼마나 싹싹하니. 근데 너는.. 센스가 없어."


아! 그녀의 "이 반찬 맛있다."는 "내가 지금 반찬 더 달라고 이모님 불러야 할까? 네가 알아서 반찬 세팅해놔."였다.



내 첫 사회생활은 이런저런 이유로 참 많이도 혼났다. 처음 겪어보는 회사생활, 처음 만나보는 다양한 연령대, 성향의 사람들이 신입이었던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피드백한다는 사실이 그 당시에는 참 견디기 힘들었다. 그 피드백이 부정적이고 세심할수록 더더욱. 아마 무심코 던지는 말들을 '어쩌라고?'의 마음으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성격도 한몫했겠지.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서투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더 편하게 생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누군가가 아주 작은 호의만, 기본적인 출퇴근 시간만 지키는 회사에 입사하더라도 "우와..." 감탄을 해버리는 나..


꼭 상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 기본적인 것들(점심시간 수저, 반찬, 물 세팅)을 챙겨줬을 때 예쁨 받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업무 내용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내용이 더 빛나기도 한다는 것(가운데 정렬, 글꼴 및 글자 크기 및 서식 및 글자색 통일)도, 모든 사람들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최소한 그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하지 않으면 미움은 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자기 일을 공감해주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내 상사가 다른 누군가를 뒷담화할 때 굳이 험담 상대의 편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맞장구는 못 쳐줄망정 들어만 줬어도 됐다.)

자신의 업무를 나에게 친히 인수인계했던 상사 덕에 '약속한 기한 안에는 내 일을 꼭 끝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배웠고, 새벽까지 야근을 하더라도 출근 시간은 칼같이 지키라고~지키라고 노래를 불렀던 상사 덕에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최소한 지각으로 혼나는 일은 없다.


제가 만난 문지기들은 모두 착했어요. 단, 무지개의 '끝'을 견딘다는 가정 하에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서툴러서 힘겨웠던 내 첫 사회생활은 '기필코 이 회사보다 나랑 더 잘 맞는 회사에 들어가야지.'라는 열정을 품게 했고, 시간은 좀 걸렸어도 해냈다. 물론 또 다른 '처음'들이 날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언젠간 그 '처음'들을 묵묵히 견뎌내면, 난 더 단단해져 있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

이렇게라도 꼰대와의 일을

내 위주로 미화 시켜 아름답게 모셔놔야겠다.

날 위해서.

이게 진짜 내 솔직한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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