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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보통 Aug 27. 2020

[리디셀렉트] 당신이 옳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는 말은 얼마나 큰 공감을 가지는 가.

이 책 자체로 아이를 다치지 않고 공감하게 하는 법을 조금 배웠다.

아직도 멀었지만 읽고 또 읽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가 그럴때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 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릴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나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날때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한다.


-아기 때부터 도리도리와 걸음마를 과외 교사가 가르치고 연인과 사랑하는 법조차 학원에서만 배울 수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일상적인 외주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산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단단한 벽 앞에 섰을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 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 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노모의 죽음 이야기나 은퇴 후 우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우울이라는 내 삶의 파도에 리듬을 맞춰 나도 함꼐 파도에 올라타야할 타이밍이다.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이 한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이해관계 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같은 관계. 최소한 나를 의식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것이다.

사람은 그'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공감이라는 심리적 무기를 가질 수 있으면 사는 일이 홀가분해진다.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비결이다. 의무가 되면 결국 내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너를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공감하는 일이다.


-혹시라도 질문을 잘못해서 상대방의 상처를 더 덧나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는 보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은

"내가 자세히 몰라서 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봐 물어보는 건데..." 하는 단서를 달고 상대방의 상황, 마음에 대해 어떤 것이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된다.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감에는 과녁이 있다.


-공감에 대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때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당신'에 주목한 말이다.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수용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의미이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금,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이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인정받고 보상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게으른 시선은 큰 둑의 작은 구멍이다. 결국 둑 전체를 무너뜨린다.


-진로는 몇회까지 바꿀 수 있는 법조항이라도 있는가. 없다. 직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열번, 스무 번 계쏙 바꾼다고 안될 이유가 없다. 계속 바꾼다는 건 흔히 생각하듯 게으르거나 끈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자기를 찾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절대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부모가 뒤에 있다는 걸 아는 딸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모든 경우의 수를 늘어놓고 합리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자신이 놓인 상황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공감에 제한을 둘 필요는 없다. 사람은 믿어도 되는 존재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이 그것이다. 온 체중을 다 실어 아이를 믿어주면 그게 어떤 일이든 본인이 오히려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닌가.' 열심히 고민한다. 안전하면 입체적이고 온전한 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마음 없이 여유 있게 내 존재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의 입장에서 더할 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엄마의 그런 태도는 아들이 자기 말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거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이 그것이다. 아이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사회적 관계의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엄마로부터 충분한 공감을 받고 자유를 얻은 아이는 상처 이전과는 또다른 아이로 성장한다.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여섯 살 아이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게 끝이 아니구나. 해결하고 벗어날 수 있는 거구나.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익한다. 그 힘으로 삶을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이 배우고 알아야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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