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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완희 Aug 24. 2024

30화 빛

'빚'더미 속, 한줄기의 '빛'

 남편이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 앞에 누워있는 먼저 간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목에서, 내 입에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죽을 만큼 견디기 힘들었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 마지막 남아있는 온 힘을 다해 울음을 터트렸다. '아악..'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 잠에서 깼다. 내 눈엔 눈물이 흥건했고, 온몸에 흘렀던 식은땀들로 입고 있던 나의 속옷과 잠옷이 전부 젖었다. 꿈을 꾸며 숨이 안 쉬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 없었고,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후에 알았다. 이것이 '가위눌림'이라는 것을.


 꿈이었지만 실제로 숨이 안 쉬어지듯, 바깥으로 내뱉는 호흡과 입을 벌려 말하려는 부분들이 내 대로 안 되어, 어떻게든 숨을 쉬고 살아보려 처절하게 애썼던 내 모습은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웠다.

나는 탁자 위 놓인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시간 새벽 5시 46분. 평소 꿈을 잘 꾸는 편은 아닌데, 남편이 죽는 꿈은 처음이었다. 온전히 잠이 깨지 않은 상태였지만 남편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가 남편의 상태를 확인했다. 남편은 내가 온 지도 모를 만큼 곤히 자고 있었다. 살아있는 걸 확인한 후 나는 내방으로 가, 대체 이게 어떤 꿈일까 검색을 했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꿈이다, 어떤 사람은 나쁜 꿈이다. 좋은 꿈이란 글에선 괜찮았지만, 나쁜 꿈이란 글에선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내 심장을 미치도록 떨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중, 6시 15분이 되어 남편의 출근 알람이 울렸고 방에서 거실로 걸어 나오는 인기척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실로 나가 남편을 안았다. 그 순간 눈물이 났고 남편은 갑자기 왜 그러나며 나에게 물었다. 아침이라 말을 하지 않으려다 결국 꿈 얘기를 했다. 남편은 나에게 "그니까, 있을 때 잘해. 오늘도 돈 벌고 올게."라는 말로 나의 눈물이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5년 전 남편의 주식, 코인투자의 실패로 몇 억의 빚더미에 앉게 되며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을 때, 이제 내 인생은 끝이구나라는 생각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다.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밖을 보아도, 내 마음엔 장마가 져서 오랫동안 비가 내렸고, 추운 계절이 찾아오면 내 마음도 시려 가슴 시린 눈물이 내 안에 하염없이 흘렀다. 마음 졸이며 살았던 시간들로, 잠 못 이룬 오랜 밤들이 나의 일상에 가득 을 때, 남편에 대한 원망도 수없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서 죽은 남편을 보며, 숨이 멎도록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울었던,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5년 전 낯선 도시의 이곳에 적응하느라 힘들게 버텼던 그때가 다시금 떠오르며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왔다. 살고 싶었지만 죽을 것만 같았던 그때, 내 앞엔 사랑하는 나의 두 딸아이가 있었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만 했다. 


 남들이 얘기했다. 돈도 없는데,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무슨 여행이냐고. 제정신이냐고. 미쳤냐고.

그때 (정신 못 차렸던) 남편이, (정신 차리고 싶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완희야. 빚이 5이나, 5 5백이나 똑같다."


 이게 말인가, 똥인가 싶지만, 그땐 똥 같은 그 말이 고마웠다. 그 말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숨이 막혀 죽었거나, 미쳐서 죽었을지 모른다. 돈이 부족했던 우리의 생활은 몸이 불편했지만,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심한 우울증을 겪으며 건강이 나빠지니 몸과 마음이 너무 아프고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떠나게 되었고 아이들과 걷기 시작했다. 남편의 그런 마음을 더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더욱 악착같이 알뜰함을 지키며 걷는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집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고, 내 몸을 혹사시키며 걸을 땐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 안에 나를 발견하며 나는 그 시간들이 소중했고 무언가에 중독된 듯, 5년 동안 틈틈이 아이들과 자연을 찾아 걸었다. 





  4년 전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멀리 갈 것 없이, 아이들과 집 뒤에 있는 한 시간 코스의 백자산 둘레길을 걸으며 자주 시간을 보냈다. 어렸던 아이들에게도, 기력이 없었던 나에게도, 둘레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우리에게 익숙한 백자산의 정상을 한번 올라보고 싶었다.

그런데 등산코스를 검색하다 안타까운 뉴스기사를 접했다. '백자산 등산로에서 50대 남성 숨진 채 발견'. 현장에는 소주, 후레쉬 등이 발견이 되었고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그 기사를 보는데 무서움이라는 감정보다는, 마음이 아프다는 나의 감정이 앞섰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 ※ 혹여나 무서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이들에겐 이야기하지 않았다. )


 그렇게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가진 채, 우린 현관문을 나섰다. 현관문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3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면발이 익는 딱 그 3분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그랬을까? 몸이 덜 풀린 상태에서 등산로 초입의 오르막길은 우리의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야자매트가 깔린 오르막이었지만, 급 경사엔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할 만큼 힘들었던 등산로의 초입, 하지만 힘들었던 것도 잠시, 단아한 소나무숲의 등산로가 펼쳐졌다.


 

간혹 구불구불하게 뻗어있는 소나무들도 있었지만, 하늘과 맞닿으려는 듯 위로만 뻗어있는 소나무들의 모습을 보니, 올라오며 가쁜 숨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리고 어느 곳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마음으로 바랐다.


 몇 십 분 전,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집 안에 있을 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함과 칼날 같은 날카로움 그리고 차가움이란 높은 방어벽이 나에게 존재했는데, 숲 안에 있을 땐 그 모든 것의 방어벽이 낮게 존재하는 걸 보니, '숲'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은 참 센 것 같다.    

그런데 콘크리트 'Concrete'라는 어원은 '함께 자라는' 의미인 'concretus'이다. 공간의 차이가 아닌, 생각의 차이가 나에겐 왜 그렇게 멀고 먼 이야기 같을까? 갇힌 공간이라 할지라도 어원의 뜻처럼 '함께 자라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긴 아직 어려운 걸까?



 1시간 반정도 쉬엄쉬엄 걸어 올라온 백자산 정상(486m),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닌 지난날 우리들이 살았던 곳, 지금처럼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던, 좋았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부유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였고, 걱정하는 마음이 큰 지금과는 달리, 걱정하던 마음이 작았던 그때를 그리워했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니 굳게 다짐했다.


'빚 갚고 이곳에서 꼭 벗어날 거야.'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순 없지만, 그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 이해가 되는 것도 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내가 나 스스로를 가둬두고 그걸 고립이라 여겼던 내 생각들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쓰잘 떼기 없고 쓰레기 같은 내 자존심이었고, 우울증은 그 결말이었다.

그런 내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바르게 다시 세운 것이 '걷기'였다. 걷는 것은 나에게 빚더미라는 어둠 속, 한줄기 빛이었고 힘든 기억들을 달래어주는 소소(炤)한 기쁨이었다. 환하고 밝은 기쁨은 내 마음으로 들어와 나를 변하게 했고, 아이들과의 걷기를 통해 마음의 힘듦을 치유받아 나만의 삶의 방식으로, 내 안에 아름다운 마음을 조금씩 채우고 있는 중이다.


 샤워를 하듯 온몸으로 낙엽바람을 맞으며 걸었던 지리산 가을길, 험난함 속 묵묵함을 지키고 있던 나무의 뿌리길, 가벼운 여행길이라 생각했지만 코피를 흘리게 했던 '고행'길, 우리가 시리얼이 된 저지방 우유길, 부처님을 뵐 뻔했던 팔백삼십 육개의 계단길, 돌과 나무들이 서로를 품어주었던 곶자왈 길, 1950m라는 희망의 가능성을 품으며 최선을 다해 최고에 도달했던 백록담으로 가는 길, 7전 8기의 마음이 간절했던 오뚝이 길, 우리의 발걸음이 왕들의 발자취를 향했던 창덕궁 후원길, 원시림 속 바다를 보며 걸었던 동백꽃길, 지리산천사들 덕분에 오를 수 있었던 천왕봉 기적길, 초보 등산러가 걸었던 1박 2일의 비움과도 같았던 비렁길, 광나듯 빛났던 일출길, 부부동맹을 결성했던 백두대간의 산 능선길, 낙동강에서 오리알이 되었던 열차길, 트로트를 부르며 걸었던 타령길, 입수금지라는 위반을 저지른 지뢰길, 부부 소나무를 꿈꾸는 엄마의 고백길, 병자호란의 아픔을 느꼈던 시린 성곽길, 영하의 추위 속 나의 옛 추억과 냥이들의 사랑을 느꼈던 꾹꾹 길, 눅눅한 장마 속 묵묵히 걸었던 제주 화산길, 무서움을 이겨내며 우리의 깜냥을 입증했던 용기 길, 신라인의 열망을 느끼며 나의 열망을 꿈꿨던 바람길, 허무함을 허물었던 자연의 소리길까지.

        


 아이들과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걸었던 길들과 걸었던 시간들을 떠올리니, 수많은 감정들이 내 마음 안에 범벅이 되어,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닌데 말문이 막히고 눈엔 눈물이 흐르고 갑자기 숨이 막혀온다.

 일상을 보내며 답답했던 엄마의 힘듦으로 때론 억지로, 때론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했던 걷기 여행이었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나에게, 걷는 것이 힘들었지만 좋았다고, 감사하다며 엄마를 안아주었고 거꾸로 엄마를 품어주었다. 

걷기 여행을 하며, 쌓여있는 우리의 '빚' 만큼 아니 그 보다 더 높은 '빛'을 쌓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걷기 여행은 내가 생을 다할 때까지 내 마음속 빛으로 간직하며 살아갈 것 같다. 



'빚' 때문에 죽을 것 같았던 우리의 생활은 

걷기라는 단순한 삶으로 일상기쁨을 느끼며,

이젠 나와 아이들의 마음속에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남아있다.







 엄마가 걷고 싶었던 곳에, 엄마가 보고 싶었던 것들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힘들지만 함께 동행해 주어서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이 세상 아름다운 것들 중, 엄마 눈에 담았던 가장 아름다웠던 건, 바로 너희들이었어. 엄마딸 나연이 나예 사랑해.  


 



우리의 걷기 여행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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