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완희 Jul 27. 2024

26화 teamwalk, teamwork

온전한 제주를 느끼고 싶다면, 성산일출봉과 우도 1-1 올레길

"와.. 배낭무게 뭐야? 캐리어 가지고 가!"  

"배낭여행에 배낭을 가져가야지. 캐리어는 안돼."


 나와 아이들을 공항까지 바래다주려고 하던 남편이 차 트렁크에 배낭을 실으며, 캐리어를 가져가면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배낭을 가지고 가냐고 물었다. 내 배낭무게가 20kg이 훌쩍 넘고, 아이들의 배낭 또한 어깨가 눌릴 정도로 많이 무거웠기에 '이 아줌마가 이번엔 또 얼마나 아이들을 고생시키려고..'라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10여 년 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겨울이라 배낭만 가지고 가기에는 두꺼운 외투에 큰 배낭을 메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작은 캐리어 하나와 배낭을 함께 가지고 다녔다. 한 달간의 여행이었고, 필요한 것만 챙긴다고 챙겼는데도 왜 그리 짐이 많았을까.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유명했던 just go의 두꺼운 여행책도 챙기다 보니 작은 캐리어도, 그렇다고 작지 않았던 큰 배낭도 함께 챙겨 여행을 했었다.

하지만 추운 날씨였어도 가을점퍼 두께의 외투를 입은 채, 머리 위로 올라오는 리터가 배낭을 메고, 배낭 옆 주머니에 콜라 1.25리터를 넣은 채, 걸으며 여행했던 외국인 배낭여행자들이 있었다. 물론, 김 빠진 콜라가 맛있었겠냐만은 내가 생각했던 배낭여행자는 그분들이 진정 승자듯 꽤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이번 제주 걷기 배낭여행은 무조건 배낭만을 메고 걷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 배낭옆주머니에 콜라 1.25리터를 넣고 다닐 것은 아니지만, 그때 못 이룬 온전한 배낭여행자의 걷기 여행을 상상했다. 


사진출처. 제주올레길 X 산티아고 순례길 공동완주 홈페이지

 그래서 제주 걷기 여행을 계획하며 나는 아이들과 진정한 '배낭여행자' 그리고 '올레꾼'이 되고 싶었고, 멀고 먼 꿈은 제주올레길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각각 100km 이상 걸어, 공동완주증을 발급받아 joint Completion 명예의 전당에 나와 아이들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올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못 갈지언정, 제주 올레길은 갈 수 있다고.

이번여행에서 제주 올레길 중 서너 코스는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행기간 내내 장마가 진행 중이라 나의 계획이 산산조각 나 부서지기 직전이지만, 제주의 올레길 중 단 하나의 올레길만이라도 꼭 완주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터라 우린 올레길 1-1코스인 '우도'를 걷기로 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이럴 땐 셀프빨래방에 빨래를 돌려놓고 아점을 먹기에 딱이다. 빨래방 근처에 있는 백반집에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드디어 우도로 가는 길, 우리 눈앞에 '성산일출봉'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신비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꼬맹이였던 첫째 5살 둘째 3살이었던 시절, 중간까지 올라가다 포기하고 내려왔었던, 아쉬웠던 추억이 있는 성산일출봉이었다.


"얘들아. 잠깐 들를까?"


 우도 올레길을 걸으려고 성산포항으로 배를 타러 가는 길에 '성산일출봉 정상을 잠깐 들를까'라는 엄마의 물음에 아이들은 '엄마.. 또 시작이다.. 큰일 났다..'라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넉넉하게 왕복 1시간 정도, 잠시 다녀오면 된다고 얘기를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성산일출봉 주차장으로 핸들을 꺾었다. (MBTI의 여러 유형 중 계획적인 성향의 J인 듯싶지만, 나는 즉흥적인 P에 조금 더 가깝다.)


 마침,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도 그쳤고, 가벼운 마음으로 성산일출봉 주차장에 주차를 했는데, 땅의 습한 기운이 모두 공기 중으로, 하늘 위로 올라가려는 듯, 보이지 않는 김이 느껴지며 찌는 듯한 무더위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였다. 마치 찜기에 들어간 나와 아이들이 수증기의 고온으로 익혀지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랬는지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걷기 여행을 하며 매일 워터파크에 온  온몸이 축축하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덕에 젖은 옷이 피부에 시원하게 닿이며, 찝찝함 속 가벼운 마음으로 성산일출봉 입구를 통과했다.

사진출처. 세계자연유산 제주 홈페이지

 우리 아이들에게 성산일출봉은 설문대할망이 빨래를 놓아두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분화구가 얼마나 컸으면 설문대할망의 빨래를 담아두었을까'를 얘기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높게 보였던 성산을 올려다보며 성산일출봉을 오르는 계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성산일출봉을 오르는 길은 숲 속을 들어가는 것처럼 나무들이 우거져있다가도, 가파른 경사 속 여러 암석들과 큰 바위들을 만나며, 이곳이 약 5천 년 전 바다에서 일어난 화산응회구임을 느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솟아있는 여러 오름들을 비롯해, 광치기 해변까지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제주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주 걷기 여행을 하며 어디를 가더라도 비구름과 함께였는데, 하늘 위 구름사이로 빼꼼히 얼굴을 보여주는 해 덕분에, 해 만큼이나 눈이 부신 제주의 풍경에 반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성산일출봉의 정상을 향했다.   



 쉬엄쉬엄 20분 정도 걸어 도착한 성산일출봉의 정상, 여름이라 그런지 분화구안으로 여러 풀들과 나무들이 푸르게 자라 있었다. 구름이 움직일 때마다 해가 깜빡거리며 분화구에 조명을 비춰주듯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정상의 분화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불어오는 제주 바다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과 일출봉 정상에서 시간을 보냈다.   


 성산일출봉 위에 있었던 어두운 구름이 다른 곳으로 밀려갔을 때쯤, '우도 올레길'을 밝을 때, 비가 오지 않을 때,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린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곧 '해녀물질 공연이 시작된다는 방송'. 해녀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기에 놓칠 수 없었다.


 "얘들아. 해녀 물질공연은 보고 가야지. 안 그래?"


 우린 가야 하는 우도를 뒤로한 채, 해녀 물질공연을 하는 바닷가로 내려갔다. 해녀분들은 물질을 할 때 부르는 노래를 부르셨고, 바다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잡는 모습도 보여주셨다. 아이들은 영상과 책이 아닌 실제 제주해녀분들을 보며 반가워했고, 성산일출봉의 정상 분화구만큼 신기해했다.





 현재시간은 거의 3시, 이제는 이상 지체할 수없다. 가야 해.  '배 타러'.

어차피 우린 '배낭만' 메고 우도로 들어가는 상황이라, 짐만 챙기면 3시 30분 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산항에 도착하여 서둘러 도항선 대합실로 들어섰는데, 우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바깥에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우도 천진항으로 들어가는 거 맞으시죠?"

"네."

"오늘 나오시나요?"

"아니요. 내일 성산항으로 나올 거예요."


 그렇게 우린 승선표를 끊고, 배에 탔다. 오후시간이라 그런 건지, 또다시 흐려진 날씨 때문인지 우도로 들어가는 배 안에는 우도 주민으로 보이는 어른들 네 분과 아이들과 나 이렇게 셋, 총 일곱 명이 전부였고, 모두 배 안, 장판 위에 누워있었다. 옆으로 누운 내 시선엔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 위, 위태로운 배 테두리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놀이동산의 바이킹을 탄 듯, 이러다 배가 뒤집힐 수도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 정도로 스릴감 넘치게 배는 우도로 향했고, 15분 정도였지만 살짝 속이 울렁거렸을 때쯤 배에서 내렸다.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전기바이크 대여점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우도 천진항의 첫 모습은 '관광지'구나 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선착장 끝 귀퉁이에 반가운 무언가가 보였다. 바로 '스탬프 간세'. 올레길의 '간세'는 느릿느릿한 게으름뱅이라는 뜻의 제주어 '간세다리'에서 따온 조랑말 이름이다. 나는 아이들과 설레는 마음으로 우도 올레길의 시작점인 간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비밀의 서랍장을 열어보듯, 조심스레 열어본 간세 서랍장 안에는 스탬프와 스탬프패드가 있었다. 우린 각자의 가방에서 올레패스포트를 꺼내어 스탬프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후우' 불어가며 정성스레 우도 1-1 올레길의 시작을 알리는 스탬프를 찍었다. 올레패스포트의 첫 스탬프를 찍었으니 이제 우도를 느끼며 걸어볼 차례.


사진출처. 제주올레트레일 홈페이지

 우리가 걸을 우도 1-1 올레길은 천진항에서 시작하여, 우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천진항으로 오는 총 11.3km를 걷는 코스다. 내일 하루종일 '비 예보'가 있어서 오늘 조금 짧은 거리를 걷더라도 고도가 높은 우도등대(우도봉) 쪽의 길을 걷기로 했다. 올레길을 걷기 전, 나는 휴대폰으로 올레패스앱의 코스 따라 걷기를 켰다. 올레패스 앱을 다운로드하여,  '코스 따라 걷기'를 누르고 올레길을 걸으면, 정해진 올레길의 코스를 이탈하는 부분이 적다.


 바닷빛만큼 푸른 하늘 위, 몽글몽글한 하얀 구름들이 떠있고 가끔 해가 우릴 비춰주면 우린 따가운 여름햇볕으로 눈이 부셔, 제대로 눈을 뜨는 것을 힘들어하며, 이 올레길을 걸을 줄 알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우릴 비추던 뜨거웠던 해는 어딜 가고 하늘엔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걷는 것은 먹구름으로 채워지는 흐린 날씨를 화창하게 만들 순 없지만, 흐렸던 내 마음속의 날씨는 화창하게 만들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내가 이곳에 서 있다는 것, 아이들과 함께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나는 흐린 날씨와 다르게 밝아지고 있는 내 몸과 맑아지고 있는 내 정신이 느껴졌다.

펼쳐진 초원처럼 넓은 마음과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눕는 초록빛의 풀잎들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가벼운 마음을 느끼며, 그렇게 우린 우도등대로 향했다.

 우도등대는 고도가 살짝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올라가는 길에 약간의 경사가 있다. 오르막 길을 걷다 초록잎으로 틈 없이 메워져 있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덩굴터널 계단과 마주했을 때, 당황했던 아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걷는 올레길의 코스 중 오늘 이 부분만 걸으면 힘든 건 거의 끝났다고, 클리어했다고 얘기하며 할 수 있다고, 올라갈 수 있다고 아이들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주며 위로 밀어주었다. 힘들 걸 알지만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많은 계단을 오르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위로 올라가는 아이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을지라도.


 나도 계단의 끝에 보였던 밝은 '빛'을 향해, '빛 같은 인생'을 향해, 한 걸음 한 계단 열심히 올랐다.



 천진항에서부터 쉬엄쉬엄 40~50분 정도 걸었을 때, 우린 우도 등대와 검멀레 해변을 향하는 해안능선길에 도착했다. 그런데 하늘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바다도 어두워졌고, 우리가 걷는 길도 점점 어두워졌다. 능선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무릎까지 자란 풀 숲길이라 어두운 것은 둘째치고 비가 오면 풀 들로 인해 길이 많이 미끄러워져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아이들과 정말 부지런히 걸었다. 쉼 없이 우도담수장을 지나 마을로 내려왔다.


 우리 몸에 40%의 에너지가 남았다고 가정했을 때, 이때 30%를 썼을 만큼 이제 우리에겐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나마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그만큼 뜨거운 해가 없는 길이 고마웠지만, 이번엔 아스팔트 길의 뜨거운 열기가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다. 흙길이었다면 발이 조금은 덜 아팠을까? 여름의 아스팔트 위를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48분이고 내 휴대폰의 배터리는 3%밖에 남지 않았다. 남아있는 배터리만큼, 우리의 체력 또한 3% 만 남았을 만큼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우리. 거의 2시간 동안 우도올레길의 1/3을 걸었을 때, 올레길 코스 어느 한쪽에 오늘 우리가 머물 우도에서의 숙소가 보였다. 이곳은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이고, 1인당 5만 원 정도로 다음날 조식(밥)을 주는 곳이다.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40대 후반으로 보였던 여 사장님과 다른 방의 20대 여성 두 분이 숙소의 거실에서 우리를 보고 놀라셨다. 온몸은 땀으로 가득하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있으며, 신발은 흙투성이로 가득한, 그건 배낭여행자의 모습이 아닌 자칫 거지꼴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늘하루 많이 습했고, 더웠던 올레길 위를, 올레길을 걷기 전 성산일출봉까지 다녀왔던 터라 더욱 고생했고 초췌한 모습의 우리였다.  

여 사장님은 나에게 우리가 머물 방을 안내해 주시며 이것저것 챙겨주셨고, 옆 방의 20대 여자 두 분은 우리 아이들에게 몇 학년인지, 올레길 걷는 게 힘들진 않았는지 등 물어보며 아이들을 편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이들은 땀으로 범벅된 몸을 깨끗하게 씻고 공용거실로 나가, 옆방 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바깥이 보였던 테이블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일기장에 적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날 저녁, 숙소 공용거실 테이블에서 하루의 일들을 조용히 생각하며 적었던 아이의 일기를 들여다보자.


그날 저녁 첫째 아이가 적었던 일기 중 한 부분.
 엄마는 맨 처음에 제주도 여행 계획에 올레길을 20km 넘게 걸으려고 계획을 했으나.. 날씨 때문에 우도 올레길만 걷기로 했다. 오예~
(중간 부분 생략..)

 난 걷기 초반에는 '올레길이 뭐길래.. 하.. 잠 와..' 하고는 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걷다 보니 '이왕 이렇게 하는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걷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걷다 보니 내 생각이 맞았었다.
긍정은 정말 중요한 존재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수백 개? 의 계단도 한꺼번에,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고, 아무리 발이 아프더라도 '이 정도 아픈 게 다행이네' 하며 참고 이겨낼 수 있었다. 나는 걷다 보니 제주도 우도만의 시골, 밭 풍경, 초원에서 뛰놀고 있는 말을 보며 '아.. 이런 게 올레길만의 풍경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풍경을 보니 '꼭 특별하게 생긴 풍경, 진짜 예쁜 풍경이 아니더라도 이런 평범한 풍경조차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부분 생략..)

 오늘은 딱 보면 '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진 성산일출봉과 처음엔 엄마의 강제 여행으로 올레길에 왔지만, 걷다 보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올레길은 최악이야'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올레길도 꽤 괜찮은데?'라고 생각이 바뀐 하루였다.

역시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게 맞나 보다.





- 다음 날 아침 -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괜찮겠어요? 천진항까지 제가 태워드릴게요."

"우도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우도 올레길 꼭 완주하고 싶어서요. 저희 걸어가 볼게요. 마음 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사장님께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아이들을 봤는데, 사장님 앞이라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사장님의 차를 타고 천진항으로 가고 싶었던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렇게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2층 숙소문을 열었는데, 어른 허리 높이만큼의 큰 개(사장님의 대형견)가 계단을 올라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둘째 아이는 깜짝 놀라 나에게 안겼다. 그리곤 그 개는 집을 나가버렸다. 어제 개가 집에 있을 때만 해도 그 개가 이렇게 크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오늘 보니 덩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1층에 있던 숙소 직원분은 집 나간 개를 보며 소리쳤다.


"콜라야! 콜라야!"


그때 처음 알았다. 그 개의 이름이 콜라인 걸.

하지만 콜라는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고, 우린 어쩔 수 없이 남은 올레길을 완주해야 했기에 숙소 사장님과 직원분과 인사를 하고 길을 걷고 있었는데, 집 나갔던 콜라가 어느새 우리 뒤를 미행(?)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길 속 아주 무섭게...


 그러더니 어느새 우리 옆에 함께 걷고 있었던 콜라, 배낭여행자들이 배낭 옆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콜라 1.25리터가 아니라, 어느새 우리 옆에 함께 있었던 건 검정개 '콜라'였다. 무엇보다 둘째 아이가 예전에 개에게 물릴뻔한 개 트라우마가 있었던 터라 나는 둘째 아이도 걱정이 되었지만, 비에 젖은 콜라도 걱정이 되어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여기 하고수동 해수욕장 근처인데 콜라가 여기까지 저희를 따라왔어요. 혹시 찾으실까 봐. 전화드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콜라가 아마 집까지 잘 찾아올 거예요."


 그러는 사이 중간 스탬프간세에 도착했고, 콜라는 우리가 올레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는 것을 기다리는 듯 우리 주변을 맴돌다, 길 건너편으로 가 있었고 둘째 아이는 길 건너 콜라를 보며 무서워서 울기직전이었다. 때마침 멀리 트럭한대가 우리가 있는 길 쪽으로 지나가던 찰나, 우리는 빠르게 옆쪽의 우도땅콩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콜라를 따돌렸다.


 우리가 워낙 급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그런지 가게 사장님이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사정을 설명하자, 사장님께서는 아무리 순하다고 해도 대형견은 대형견이라며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콜라가 우리를 찾지 못하도록, 또 놀란 아이들의 마음도 달랠 겸,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콜라 분에 먹을 있었던 우도땅콩 아이스크림과 한라봉 아이스크림.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콜라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기를 바랐다.   



 그날, 아이의 일기를 살짝 들여다보자.


첫째 아이의 일기 중, 한 부분.
 나는 맨날 "난 크면 강아지 키울 거야"라고 했던 게 새삼 오싹하게 느껴졌다. 나는 진짜 이 강아지 때문에 다리가 떨리고, 트라우마가 생기고, 고생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오늘은 총 8.6km를 걸어야 하는데, 강아지가 우리를 계속 따라왔다. 아니 따라오는 게 아니라 약 2km 넘게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나는 2km를 걷는 동안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우린 아이스크림가게에 들어가 피신을 했다. 그리고 15분 후 밖에 나와보니 강아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 후로 검은 색깔만 보면 그 강아지인가 싶어서 긴장을 했다.






 '비' 특히 '장맛비'는 제주 걷기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어제오늘 올레꾼인 우리에게, '방해꾼 같은 존재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하고수동 해변과 산호해변인 홍조단괴해빈 근처, 높은 파도 때문에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가까이 가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더욱 '비'를 원망하며 걷고 있었다. 섬의 형태가 소가 드러누웠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같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우도(島)가, 우리에겐 온전한 길의 우도(雨道 비. 우/ 길. 도)였던 우도의 올레길이었다.


 하지만 올레길을 걸으며 주어진 자연을 원망해 본들 내 마음만 속상할 뿐이다. 어제저녁 아이의 일기처럼, 힘들고 내 마음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긍정'의 마음으로 생각하며, 내가 내 마음을 긍정으로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에게 쏟아붓는 이 장맛비에 길 위의 흙탕물 같은 여러 가지 마음으로 뒤섞인 내 마음이 깨끗이 씻어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빗소리에 집중하며 길을 걸었다.



 지나가는 차들도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빗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만 들렸던 우리가 걷던 올레길에 어디선가 '호오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다 저 멀리 물질하는 해녀 세 분의 모습이 보였다. 비가 거칠게 내리고 있었고, 파도도 거칠게 치고 있는 바다에 주황색 테왁하나에 의지해 바닷속을 드나들며 물질하는 해녀분들의 모습과 '호오이'라고 소리 내는 숨비소리가 갑자기 마음뭉클거리게 만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숨을 참으며 물질을 하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제주 해녀의 강인한 모습이, 삶의 힘듦이 있더라도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들 땐 '호오이' 소리 내며 잠깐 쉬어가도 된다고.

아이들은 제주에서 해녀의 삶을 살고 있는 해녀분들이 너무 존경스럽다고 했다. 천진항에서 성산항으로 향하는 배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에도, 나와 아이들은 해녀분들의 물질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해녀분들의 물질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지금 가지 않으면 다음 배를 타야 하기에, 우린 저 멀리 성산항으로 향할 배가 보이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고, 차들은 배 갑판에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승선표를 끊고 마지막 완주 스탬프를 찍기 위해 스탬프간세로 뛰어갔다. 스탬프를 찍는 중간 빗물에 올레패스포트가 많이 젖어 속상해했지만, 그럼에도 올레길 걷기를 무사히 끝낸 기쁨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았다. 출항하기 2~3분 전 겨우 성산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며 우리의 우도 1-1 올레길의 걷기를 마무리했다.






 차로 돌아와 젖은 등산화를 벗고 축축한 양말을 벗는데, 쪼글쪼글 할머니 발이 되어있었던 우리 아이들의 발. 이 올레길이 뭐라고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고 아니, 쏟아붓고 있는데 걷는다고 난리를 쳤는지.. 발을 보니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뽀송한 새 양말로 갈아 신어도, 젖은 신발로 다시 축축해졌던 아이들의 발.

그날 저녁을 마지막으로 제주 걷기 여행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 아이들의 발에 피부가 한 겹 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햇볕에 그을려 피부가 타면 한 겹 씩 벗겨지는 것처럼. 그리고 씻어도 씻어도 발에서 '미소된장국' 냄새가 난다고 했다.


 미소된장국 냄새를 풍기는 발에서 콩 껍질이 벗겨지듯, 한 겹씩 벗겨지는 피부를 보며 아이들은 그날 걸었던 건 '기적'이었다고 나에게 얘기했다.



 엄마가 너희를 만난 것이 기적이듯, 눅눅한 장마 속 묵묵하게 걸어주었던 너희의 모습은 엄마가 생각해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적이었어. 그래서 더욱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엄마의 마음 안에 남아있단다.


 성산일출봉과 우도 올레길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던 건 함께 걸었던 기적적인 teamwalk 때문이었고,


 그것을 일궈낸 힘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던

기적적인 우리의 teamwork 때문이라 생각해.  


teamwalk도, teamwork도 나연이 나예여서 가능했던 거야.




우도 1-1 올레길을 걷고 난 후, 성산항에서 찍은 사진


 비가 오지 않았어도 걷기 힘들었을 엄마와의 제주 걷기 여행을, 비가 와서 걷는 것이 더욱 힘들었음에도 엄마와 함께 동행해 준 나연이 나예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스물다섯 번째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 아이들과 걸었던 우도 1-1 올레길의 11초 짧은 영상입니다.






이전 25화 25화 '밤'의 곶자왈, '낮'의 곶자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