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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완희 Jul 13. 2024

24화 층층이 쌓인 지층, 층층이 쌓인 걸음

화산학의 교과서, 제주 '수월봉 엉알길' 지질트레일

"어머니. 나연이가 계단을 내려가다가 손목을 다친 것 같은데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네. 코치님. 제가 지금 인라인장으로 바로 갈게요."


 2023년 5월 초 장마 아닌 장맛비가 내리던 날, 첫째 아이가 인라인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바닥을 짚으며 중심을 잡으려고 하다가, 손목을 다치고 말았다. X-ray를 찍어보니 아이 손목의 뼈 한쪽이 부서져 튀어나와 있는 상황이었고, 뼈를 고정시켜 한 달 반 정도 통깁스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도, 3.4월 아이들의 새 학기 적응도, 무사히 지나가면 아이들과 조금씩 걷기 여행을 시작하려고 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깥의 공기는 포근했고, 조팝나무 꽃들이 하얗게 피어있는 아파트 담벼락을 걸으며 내 안의 걷기 세포들이 나를 마구 자극했지만 아이들과 걷는 여행을 상상하며 몇 개월을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러던 중 발생한 '돌발상황'이었다.


 다친 손목의 아픔과 통깁스의 불편함으로 아이가 속상해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더 속상했기에, 걷기 여행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반' 가량 통깁스를 한 첫째 아이는 집-학교-집-학교를 반복하며 보낸 시간이 많아서 그랬는지 팔의 깁스를 풀면 쉬엄쉬엄 걷는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나 또한 강화 마니산 산행 이후 아이들과 '6개월 만에 떠나는 걷기 여행'이었기 때문에 이번엔 좀 특별한, 그리고 아이의 의견을 반영해 쉬엄쉬엄 걷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또한 내가 아이들과 처음 지리산 노고단을 갔을 때의 마음처럼,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의 풍요로움을,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배우는 지식들과는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마와의 걷기 여행으로만 얻을 수 있는 가치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산의 숲길과는 또 다른, 자연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발견한 이곳.


오늘 우리가 걸을 곳은 제주 '수월봉 엉알길'이다.




 첫째 아이 4학년 둘째 아이 2학년이었을 때, 한라산을 오른 후로 2년 만에 찾은 이번 제주여행은 렌터카와 캐리어가 없는, 버스와 배낭만이 존재하는 '제주 배낭여행'이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이틀 동안 배낭을 메고 버스를 타며 여행을 했었는데, 쉴 새 없이 비가 내리는 '장마' 속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우비를 입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여행을 하는 것이 비가 오는 날씨에는 무리인 것 같아, 3일째가 되어서야 렌터카에 우리의 배낭과 몸을 실었다.


 '그런데 뭐지?' 이틀 동안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고, 렌터카를 빌리러 가던 길에도 비가 내렸는데, 막상 렌터카를 타고 렌터카 회사의 입구를 빠져나오니 비가 멈췄다... 순간 '렌터카를 다시 반납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다 뒷좌석을 보니, 아이들은 '이제 드디어 살 것 같아요.'라고 얘기하는 듯, 눅눅하고 조금은 축축한 등산화를 차 바닥에 벗어놓은 채, 양말을 말리며 밝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아직 6학년, 4학년밖에 안 된 초등 여자 아이들에게 이틀간 내가 너무 고생시켰나?'라는 생각이 들며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조금 쉬엄쉬엄 걷자.'   


 렌터카 회사들이 밀집해 있는 제주공항 근처에서 수월봉까지 가는 길은 1시간가량 걸렸는데, 20분 정도 남았을 때 안개가 길 위로 자욱이 내려앉으며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차들은 일제히 비상깜빡이를 켜고 서행하며 움직였고, 우리도 빗길 속 안전운행을 하며 수월봉 쪽으로 이동을 했다. 그런데  여긴 분명 제주인데 제주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넓게 펼쳐진 밭 뷰. 제주에선 어디를 가더라도 담이 있었는데, 이곳은 (돌) 담이 없는 들이었다. 하지만 사이로 걸어가는 서너 분의 올레꾼들과 올레길의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를 보니  분명 제주이고, 이곳은 제주 고산리의 '고산평야'다.


 고산리 일대에서 가장 오래전에 형성된 화산체인 당산봉 화산체 형성 이후, 점성이 낮은 광해악 현무암이 흘러와 당산봉 화산체를 둘러싸고 흐르면서 현재 고산지역의 넓은 평야 기반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수월봉의 화산암 알갱이들이 오랜 시간이 흘러 흙이 되었기 때문에 고산평야에는 돌이 귀했고, 돌이 귀했던 만큼 밭담을 쌓을 수 없었다고 한다. 


 넓게 펼쳐져있던 고산평야의 많은 밭을 지나자, 수월봉 엉알길 입구가 나왔다. 우린 원래 이곳에 주차를 하고 수월봉까지 걸어 올라가려고 했는데,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굉장히 습한 날씨에 안개까지 많이 끼어있어, 도저히 걸어서는 올라가기 힘든 상황이라 결국 차를 타고 수월봉으로 이동했다.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선 분명 걸어서 수월봉을 올라간다고 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수월하게 수월봉에 온 아이들은 마냥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겠지만  "엄마.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기분 좋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우린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수월봉의 정상을 한 바퀴 걸었다. 수월봉 아래보다 수월봉의 정상은 짙은 안갯속이었고, 몇 미터 되지 않는 가시거리로 이곳만 보일 뿐, 다른 곳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넓게 펼쳐진 제주 바다가 보고 싶었고, 저 멀리 차귀도와 당산봉도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는데, 수월봉 정상에 서있으니, 이곳에서 부는 거친 바람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수월봉의 아쉬운 마음이 컸던 만큼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우린 수월봉 엉앙길 입구로 다시 내려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늘게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쳤다는 것. 정상에서의 멋진 풍경은 보지 못했지만, 수월봉 엉알길은 걸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엉알'이라는 말은 제주어로 높은 절벽아래 바닷가라는 라는 뜻, '엉알길'은 해안절벽을 따라 놓인 길이다. 우린 천천히 수월봉 엉알길 입구로 들어갔다.

 세상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해안절벽은 더 거대했다. 어떻게 이런 화산재의 지층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겉으로 보기엔 퇴적암처럼 보이지만, 수월봉 화산 분출 당시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분출물이 쌓여 형성된 응회암인, 화산재 지층이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해안절벽의 색깔이 더 진하게 보였고, 아이들은 화산재 지층을 보며 겹겹이 쌓인 초콜릿 같다고 얘기하며 박혀있는 화산탄은 아몬드 같다고 했다.


 화산재가 겹겹이 쌓인 지층은 아몬드초콜릿만큼이나 아이들의 호기심과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첫째 아이는 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지층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리고 예전에 학교 과학시간 교과서에서 지층을 배웠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욱 웅장하고 신기하다고 얘기하며, 한참 동안 화산재 지층을 보았다.

수월봉 해안 절벽 곳곳에 박혀있는 화산탄들과 휘어진 지층의 탄낭구조를 보며 아이들과 오래전 수월봉에서 일어난 화산활동에 대해 상상했던 것들을 함께 이야기해 보며 엉알길을 걸었다.


 아이들과 엉알길을 걸으며 수월봉의 화산활동에 관련된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지만, 그 외에도 제주의 바다, 돌, 파도, 해녀 등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며 걸었던 그 시간들이 서로에게 너무 소중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학습의 차이들로 가끔 우리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비교가 될 때마다, 무언가 뒤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걷기 여행을 하기 위해 모은 비용을 '아이들 학원이라도 하나 더 보내야 하나?'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하지만 자연 안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이런 소중한 마음을 느낄 때마다, 그 어떤 학원보다 엄마와의 걷기 여행만큼 가치로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을 키우는 나의 교육철학에 오늘도 그 마음이, 내 마음 한켠에 굳게 자리를 지키며 힘들 수도 있는 엄마와의 걷기 여행을 기꺼이 따라와 준 아이들이 고맙기도 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엉알해안을 따라 자구내 포구 방향(차귀도)으로 조금 걷다 보니, 일제 말기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군사시설인 갱도 진지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제주도 근해의 상황이 심각해졌고, 1945년 초부터 제주도에 미군 상륙의 방어를 위한 해안가 구축작업으로 만들어진 갱도 진지.

수월봉의 화산활동만큼 격렬하게 만들어졌을 갱도 진지를 보며, 일제의 만행과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되새겨졌다. 흐린 날씨로 더욱 어둡고 깜깜했던 갱도 진지 안을 살펴보며 둘째 아이는 무섭다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어두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기에 그 시대를 사시며 나라를 위해 애써주신 분들의 감사함을 생각하며 엉알길을 이어 걸었다.




 엉알길 입구에서 자구내 포구까지 걷는 길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계단도 없는, 평지길인 '무장애 바닷길' 이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과 몸이 불편하신 어른들도 무난히 걸을 수 있을 만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멀리 차귀도를 바라보며 산책하듯 쉬엄쉬엄 엉알길을 걸어, 자구내 포구까지 800m 정도 남았을 때 해안절벽 지층사이로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에 '수월봉의 전설'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걷고 있는 수월봉 엉알길에는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아이의 일기를 통해 적어보도록 하겠다.


수월봉 엉알길의 '녹고의 눈물'을 보고 난 후, 아이가 적은 일기 중 한 부분


그리고 좀 더 걸으니 눈에 뭔가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녹고의 눈물'이라는 곳이다. 왜 이곳을 '녹고의 눈물'이라고 하냐면 옛날옛적에 수월이(누나), 녹고(남동생)이 살았는데 수월이와 녹고의 엄마가 불치병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슬퍼하던 도중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100가지의 약초를 다 모으면 너희 엄마가 살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 수월이와 녹고는 약초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100번째 약초를 뜯으러 간 수월이는 약초를 뜯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녹고 가 슬퍼하여 눈물을 흘린 게 '녹고의 눈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녹고의 눈물은 지층 안에서 지하수가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수월봉은 수월이가 약초를 뜯다가 떨어진 장소를 말한다. 나는 녹고의 눈물을 보고 지층 안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이 전설을 들으며 녹고와 수월이의 효심이 대단하고, 부디 녹고와 수월이의 어머님이 낫기를 바란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저녁 첫째 아이가 적은 일기 중 한 부분.

 

 아이와 보았던 '녹고의 눈물'은 해안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아래 진흙으로 된 고산층이라는 불투수성 지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샘물의 일종이라고 한다. 화산재 지층의 신비로움은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끝이 없는 것 같다.



 걷는 길 왼편으로는 제주의 넓은 바다, 걷는 길 오른편으로는 층층이 쌓인 화산재 지층, 그 사이로 짭짤했던 바다의 공기를 맡으며, 옅은 안갯속 작은 물방울들을 헤치고, 철써덕 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걷는 기분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제주를 여행하며, 왜 이제야 이곳에 왔을까? 왜 이곳을 몰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터 알았더라면 아이들과 몇 번 오지 않은 제주였지만, 그럼에도 제주를 올 땐 무조건 와 보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이 길을 걸을 때 느꼈던 감동이 무척 크게 다가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끼며 걸을 수 있도록, 이 길을 만들어주신 분들께도 감사한마음이 들었다.



 우린 수월봉 엉알길의 끝인 제주 고산 해양경찰서까지 걷고, 저 멀리 안개로 가득한 수월봉을 바라보며 다시 엉알길 입구로 돌아가며, 수월봉 엉알길 걷기를 마무리했다.



 수월봉은 약 18.000년 전, 지하에서 상승하던 마그마가 물을 만나 강력하게 뿜어져 나온 화산재들이 쌓이면서 형성된 응회환의 일부다. 수월봉 화산쇄설암층에는 여러 화산재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지층을 볼 수 있다. 화산탄들이 박혀 울퉁불퉁했던 지층도, 화쇄난류가 흐르며 쌓인 거대 연흔 사층리 구조도, 화산암괴가 낙하할 때 충격으로 내려앉은 탄낭의 구조까지 여러 형태를 가진 화산재들이 쌓여 지층을 만들었다.


 수월봉이 만들어진 시간에 비하면, 우린 수월봉 해안절벽에 붙어있는 아주 작고 작은 흙 알갱이 정도 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조그마한 존재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며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며 우리의 삶이 늘 제자리걸음이라 여겨질 때도 있지만, 아이들과 걷기 여행을 하며 걸었던 시간, 아이들과 걷고 있는 지금, 아이들과 앞으로 걸을, 걸음의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걸음들이 세월이 지나 언젠가는 아주 소중한 우리만의 가치로움을 만들어 낼 거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층층이 쌓인 우리의 걸음이,

층층이 쌓인 화산재 지층처럼.



습한 날씨 속 중간중간 내리는 비로, 걷는 것이 힘들었음에도 엄마와 함께 동행해 준, 나연이 나예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스물세 번째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 수월봉 엉알해안길 입구에서 발생한 수월봉 화산쇄설층 일부 사면 붕괴에 따라 일부구간(엉알해안길 입구~자구내 포구), 별도 공지 시까지 임시 출입통제 한다고 합니다. (현재 2024.7.13)


사진출처. 제주도 지질공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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