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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완희 Jun 29. 2024

22화 삼배구고두, (한숨이) 구만구천 두

겹겹이 쌓였던 한숨과 설움, '남한산성 둘레길'

7. 밑줄 그은 '이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사진출처. EBS스토리 한국사 교재 중 p95

➀ 충주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➁ 행주산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➂ 남한산성에서 적과 맞서 싸웠다.

➃ 처인성에서 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제시된 자료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신하들 사이에서 청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화의를 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대립하는 장면이다. 화의를 주장하는 편은 조선이 싸울 힘이 없으니 어떻게든 나라를 보존해야 한다는 실리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정답은 ➂번.


 이 문제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7회 초급 기출문제로, 첫째 아이가 6학년을 앞두고 EBS 스토리 한국사교재를 통해 공부한 내용이다. 아이가 문제를 풀면 매겨주는 것은 엄마의 몫이므로 오늘도 펜을 들고 정답지를 보며 정성껏 푼 문제를 매겨주었다. 항상 어떤 부분에 대해 공부를 하고 문제를 푸는 과정이 끝나면, 나는 유튜브에 관련된 영상을 찾아 아이가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보여주곤 했다. 그날은 영화 '남한산성' 스페셜 역사 영상(설민석강사님의 해설)을 보여주었는데 한 번으론 아쉬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영상을 보았던 아이였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속담이 있듯,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실제로 한 번 보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뜻으로 실제로 경험하는 것의 중요성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걷기 여행의 장소는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하고 있는 '남한산성' 둘레길이다.



 

 병자( 丙子)년이었던 1636년 12월 그때만 하겠냐만은,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뚫고 임인(壬寅)  2022년 12월 우린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그때야 이곳이 산속에 둘러싸여 있고 위로 쌓아진 성곽 안 행궁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존재하였겠지만, 지금은 식당가와 카페가 즐비하고 주차장에 차들이 빈 곳 없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자아냈다. 주말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오늘 최고기온이 영하 2도인데도 불구하고 반 이상의 등산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붐비는 까닭은 아마도 남한산성 둘레길의 아름다움 때문과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더욱 그런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남한산성의 둘레길을 걷기 전, 남한산성행궁을 먼저 둘러보기로 하여 매표소에서 표를 끊는데 둘째 아이의 시선에 남한산성행궁입구보다 '기념품샵'이 더 눈에 띄였나 보다.

"엄마. 남한산성 다 걷고 기념품샵에 가면 안 돼요?"

"그래. 다 걷고 나서 엄마랑 같이 기념품샵에 가보자. 가서 예쁜 게 있는지 우리 찾아보자."

'선사시대, 고조선시대'만 배운 3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병자호란이라는 것, 남한산성이라는 곳을 이해하기란 어려울 있지만, 함께 동행하며 걷는 것의 고마운 마음이 들어 걷고 난 후, 기념품샵을 들르기로 하고 우린 조선시대 임금이 머물렀던 행궁 가장 규모가 컸던 남한산성행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漢南樓)로 들어갔는데, 붐볐던 바깥에 비해 행궁 안은 한산했고 조용했다. 자연스레 몸을 움츠리게 만들 만큼 추운 날씨였지만 행궁 안을 둘러보는 사람들은 편안했고 여유로워 보였다. 대학생들과 교수님으로 보이는 분들이 한 곳에 모여 남한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또한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한 가치를 잇는듯한 느낌이 들어 그들을 비추는 따뜻한 겨울의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사진출처.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는데,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항전하였던 곳이다. 안타까웠던 부분은 1909년까지 잘 남아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훼손되어 이후, 페허로 방치되었다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10년여에 걸친 복원 끝에 2012년 5월 24일 100년 만에 남한산성 행궁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을 둘러보며 병자호란 당시 6일 만에 수도 한양이 청나라의 손으로 들어가고, 강화도로 도망치려다 적군이 막아놓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곳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가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태로움을 겪었던, 시대의 상황을 떠올리니, 인조가 타협 속에서 살 길을 모색해 나가야 했던 무거웠던 마음과 동시에 역사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첫째 아이의 일기 중, 한 부분
 행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행궁 자체이다. 나는 행궁을 둘러보며 병자호란 때 인조가 느꼈을 마음인, 남한산성 안에서 신하들이 척화파와 주화파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봄 인조는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운 마음과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항복하러 나가려는 인조의  무거운 마음, 이 모든 것이 남한산성 행궁에서 느껴졌다. 지금(오늘날) 내가 봐도 이렇게 가슴 아픈데 오죽하면 인조는 주화파의 손을 들어 항복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첫째 아이의 생각처럼, 오죽하면 인조가 주화파의 손을 들어 항복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청과의 전쟁을 피하고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가 맞나, 적이나 상대와 화의(議)하는 것을 거부하는 척화파가 맞나. 마음은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현실을 직시하여 주화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인조였을 터. 그 당시 현실적 감각을 상실한 조선 사대부들의 모습도, 남한산성 행궁을 둘러보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남한산성둘레길을 걸어볼 시간, 우리는 남한산성의 다섯 갈래의 둘레길 중 아이가 궁금해했던 '서문'을 볼 수 있는 2코스로 향했다. 서문과 수어장대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해서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이 예상은 되었지만 대체로 아이들과 걷기에 무난한 길이었다. 또한 초입의 왼편으로는 아이들이 둘러보았던 행궁을 오르막길의 끝에 닿았을 때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30분가량 쉬엄쉬엄 둘레길을 올랐을 때, 아이가 보고 싶어 했고 궁금해했던 '서문'에 다다랐다.  


 

 나는 잘 걷다가 서문을 보니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원래 왕은 남문으로만 다녀야 하는데,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청나라에 항복하며 1637년 1월 30일 좁은 서문으로 나갔을 '인조'를 생각하니 그때의 상황에 내 마음이 이입되어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첫째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첫째 아이의 일기 중, 한 부분
 아이고~ 소리가 나 던 찰나 드디어 서문에 도착하였다. 서문은 인조에게도 참 아픈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서문은 인조가 후금의 황제에게 항복을 전하러 갈 때, 가장 작은 문인 서문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인조의 심정을 생각하며 서문을 통과했다. 인조의 심정은 바로 한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문 위쪽에서 성 둘레길을 걸었다.



 그때와 지금 우리의 모습은 다르지만, 이 문을 통과하며 '한숨'과 '설움'이 겹겹이 쌓였던 마음은 같지 않았을까. 처참하게 패한 전쟁으로 병자호란의 상처는 컸다. 청의 군대는 수많은 조선 사람을 포로로 끌고 가, 그곳에서 노예가 되었고 그들을 데려오기 위해선 많은 돈을 내고 사 오는 수밖에 없었다. 남은 가족들은 노예가 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재산을 모두 내놓기도 했지만, 그런 가족들의 마음을 눈치채고 청에서는 날이 갈수록 더 높은 포로의 값을 불렀다고 하니 가족들은 얼마나 애타는 마음이었을까.  

우리의 좋았던 역사만 알아가는 것이 아닌, 슬프고 아픈 우리의 역사이기도 한 '병자호란'을 알아가는 것을 아이와 남한산성 둘레길을 걸으며 느껴보니 우리 집과 먼 거리지만 '여길 잘 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을 나와 아이들과 높은 성벽을 손으로 만져보며 둘레길을 걷던 중 발견한 작은 눈사람. 나름 눈도 있고 코도 있었다.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팔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부서질까 눈으로만 보았다. 눈사람만큼이나 성벽은 소중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파른 언덕에 기댄 듯 '들여쌓기 양식'으로 쌓은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기법이다. 이 들여쌓기 양식의 성벽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며, 그것으로 성곽의 원형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비록 47일 만에 항복하였지만, 그 기간 동안 인조와 신하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을 성벽이 늠름해 보였다.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산에 견고한 성벽이 둘러쳐진 모습을 보며 한참 둘레길을 걸어올라 가는데, 고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과거를 여행하며 아이들과 걷고 있는 이곳에서 현재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세먼지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남산타워도 보였고, 촘촘하고 빼곡하게 세워져 있는 서울의 아파트와 빌딩들 그리고 한강도 보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높이 솟아있는 서울 롯데타워를 보며 궁금해했고 가보고 싶어 했다. 친구들은 서울여행을 가면 롯데월드도 가고, 재밌는 공연도 보는데 우리는 맨날 산에만 다닌다며 참았던 재채기처럼 아이들의 불만이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그래. 다음에 서울여행 가면 우리 롯데월드는 꼭 가보자. 엄마가 약속할게."라고 얘기했다.

( ※ 얘기했지만, 2024년 6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걷기 중독자가 된 엄마와 산으로 둘레길로 다니느라 롯데월드 입구에도 가보지 못한, 롯데월드에 '롯'자도 구경 못한 아이들.. )


 분명 '롯데월드'가 너희들에게 주는 즐거움도 있을 테지만, 엄마는 왜 그렇게 너희들에게 걷는 즐거움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는지...

하지만 "얘들아. 올해는 무조건 꼭 가자! 롯데월드도 갈 거지만,  롯데월드 옆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했던 곳(삼전나루터) 지금의 송파나루가 있는데 그곳에 삼전도비(삼전도청태종공덕비)가 있다고 하니, 간 김에 그곳을 한번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삼전도비(삼전도청태종공덕비):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세운 전승비,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비석.



 둘레길을 올라오며 보았던 롯데타워만큼은 아니지만,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장대인 '수어장대'에 도착했다. 원래 다섯 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장대가 바로 수어장대이다. 서쪽 청량산 정상에 세워진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건물 중 가장 웅장한 모습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수어청 중앙군들의 훈련을 관장하던 군사 지휘소로 역대 많은 임금들이 군사적 목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찾았던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그때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를 찾아 군사의례를 행하거나 자신들의 선조인 인조의 병자호란을 기억하며 국방의 의지를 다졌던 곳이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아이들과 수어장대를 둘러보고 둘레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수어장대와 내려가는 길은 온통 사계절 푸른 소나무가 가득한 소나무숲이었다. 남한산성이 겪은 세월의 풍파를 함께 겪었을지도 모를 높고 우람했던 소나무들, 아팠던 역사를 푸른 소나무가 남한산성 곁에 머물며 치유해 주듯, 우리의 푸른 앞날도 함께 얘기하며 둘레길 걷기를 마무리했다.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고 난 후, 여러 식당가들 중 노포느낌이 나는 만두집으로 들어가 칼국수와 만두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주인아저씨께서 아이들에게 따뜻한 군고구마를 한 개씩 주셨다.



 청나라의 황제 홍타이지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에 인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임금의 옷을 벗고 죄인의 신분으로 푸른색의 옷을 입고 삼전나루에서 청나라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頭)를 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는데,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씩 대었다. 삼배구고두를 했던 인조와 그 모습을 지켜봤던 신하들, 백성들의 마음에 한숨과 설움이 구만구천 두까지 겹겹이 쌓였을 것이다.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겹겹이 에워쌌던 그때, 그때의 한숨과 설움대신 지금은 따뜻한 온기가 남한산성을 겹겹이 에워쌌으면 한다. 추웠던 날 사장님이 아이들에게 주셨던 따뜻한 마음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군고구마처럼.






 

 엄마와 성벽둘레길을 걷자고 남한산성으로 왔는데, 걷다 보니 성벽 '산길'을 걸었던 나연이 나예. 영하의 추웠던 날씨였음에도 엄마와 함께 동행해 주어서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스물한 번째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남한산성 행궁과 둘레길에 대한 정보는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gg.go.kr)


사진출처.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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