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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완희 Aug 17. 2024

29화 허무함을, 허무는 우리의 걷기

자연의 소리 들으며 걷는, 합천 '가야산 해인사 소리길'

[prologue]


어쩌다 우리 아이들의 생각 속에 아빠라는 사람은 돈을 '버는' 사람으로, 엄마라는 사람은 돈을 '쓰는' 사람으로 비치게 되었을까? 나로서는 매우 억울한 일이지만, 한술 더 떠서 엄마라는 사람이 좋아하는 말은 아빠의 사랑해라는 말보다, 아빠의 "입금했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는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아이들의 시선에 엄마의 결제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았거나 아니면 '입금' 되기 전과 후 엄마의 표정과 행동이 달라 보여서 그렇게 느꼈던 걸까?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그런 아이들의 생각들을 철저히 무너뜨린 ''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엄마. 이번 현충일 연휴에 소리길은 어때요?"


 살다 보니 이런 일이, 아니 별일이 다 있다. 아이의 입에서 '걷는 건 어때요?'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자, 남편이 나에게 얘기했던 '입금했어'라는 말보다, 더 더 기분 좋았고 이보다 더 행복할 수없었던 아이의 말을 들었다. 늘 협상으로, 반강제로 아이들을 산으로 둘레길로 데리고 가다시피 했는데 오늘 나에게 주어진 모든 운을 아이의 말에 다 쏟아부었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나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아이의 말이 쏜살같이 훅 지나가버리기 전에 나는 아이에게 달려가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며 얘기했다.


"소리길? 엄마가 저번부터 가보고 싶었던 길이었는데, 나연이 어떻게 알았어?"






 아직 유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햇볕이 꽤 따갑게 느껴지는 오후다. 이렇게 더운 날씨엔, 아침 일찍 걷거나 아니면 오후 느지막이 걷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오늘 우리의 걷는 시간은 많이 어중간하다. 지금 시간이 오후 1시 40분이 넘은 시간 이어서 그랬는지 소리길을 걷는 사람들은 우리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 한낮의 햇볕은 고스란히 우리 위에 내려앉아 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 정수리가 빨갛게 달아오를 만큼 몸이 뜨거워졌지만, 한적하고 조용한 소리길의 자연소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으며 소리길 안으로 걸어갔다.     

 

 소리길 위엔 큰 바위 작은 바위사이를 헤치며 흐르는 계곡물소리, 나무들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와 더불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수다소리, 우리가 걷는 발소리가 들렸고, 소리길 아래엔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들과 풀벌레들이 보였다. 그러다 우리 발밑에 여기저기 진한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는 길을 마주했다.


"세상에.. 이거 오디잖아?"


 아이들과 지금까지 산을 오르며 둘레길을 걸으며 함부로 무언가를 따거나, 따서 먹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가야산 소리길을 걸으며 내 머리 위로 닿이는 뽕나무를, 까만 듯 보랗고 탐스럽게 달려있는 오디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나무아래 수많은 오디가 떨어진 것을 보니 주인이 없는 나무인 것 같아, 서너 개 따서 내 입속으로 넣었다. 오디의 작은 꼭지를 손으로 잡고 입에 넣은 채 꼭지를 손으로 당겨 입안에 알맹이를 오물오물 씹어서 먹은 오디의 맛은 달달하고 살짝 시기도 한,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건강한 맛이었다.

내 입술과 내 혀 그리고 내 앞니까지 검보랏빛으로 온통 물들게 한, 유월의 소리길에서 맛본 뽕나무의 열매. 정말 오랜만에 본 '오디'였다.


 나는 아이들의 입에도 오디를 하나씩 넣어주었다. 탐스럽게 익은 오디는 아이들의 입에도, 혀에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였고, 아이들은 서로의 물든 입을 보며 한바탕 웃고 난리가 났다. 피를 빨아먹은 귀신같다고 얘기하며 귀신흉내를 내 듯, 왜틀비틀 소리길을 걸어갔다.


 아이들과 걷는 가야산 소리길은 이름 그대로, 계곡과 소나무숲을 걸으며 계곡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이라고 하지만, 소리뿐 아니라 이렇게 계절마다 존재감을 밝히는 자연의 보석들이 다르니 만약 유월에 소리길을 걷는다면, 걷는 길 아래로 까맣고 보랏빛이 나는 수많은 오디들이 떨어진 길 위, 이 길이 소리길이 아닌 뽕나무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뽕나무의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유월의 소리길 1구간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폴폴 단 내를 풍기는 여러 오디나무 아래를 쉬엄쉬엄 걷다 보면 황산마을 입구와 마주하게 된다. 작은 동네슈퍼와 제법 나이가 든 나무 그늘아래 장판이 깔린 넓은 평상을 보니 아이들의 그림책에서 보았던 시골마을의 풍경이 느껴지는 듯 마음이 편해졌다. 쯤, 가야 황산주차장(소리길 탐방지원센터)을 시작으로 소리길을 걷는 분들이 계셨다. 저 멀리 가야산 소리길이라는 나무 문이 보이며, 그 앞엔 소리길탐방센터가 보였다. 우리가 걷는 소리길의 안내책자도 여러 개 놓여있어서 가까이 다가갔는데, 마침 국립공원 직원분으로 보였던 남자분이 우리에게 소리길 안내책자를 한 부 건네주셨다. 우리는 인사를 드렸고 2구간 소리길의 문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턴 본격적인 숲 속의 소리길로 들어간다.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으로 달궈진 내 몸은 나무로 우거진 숲의 그늘이 한 김 식혀주듯, 서서히 열기를 내렸다. 흙길과 데크길로 이어지는 길의 왼쪽엔 울창한 나무들의 숲이, 오른쪽엔 소리길의 계곡이 힘차게 흐르며 시원한 물소리를 담아냈다. 당장에라도 계곡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얼마나 시원할까?


 그때 계곡 안에 발을 담그며 앉아있는 어른들을 보며, 남편은 나에게 우리도 잠시 계곡에 발을 담가 보자고 얘기를 했고 우리는 계곡가까이 다가갔다. 각자 평평한 돌을 찾아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계곡물은 시원함을 넘어 얼음물같이 차가웠다. 걸으며 뜨거울 대로 뜨거워진 발이라, 더욱 차갑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두 발만 계곡물에 담갔을 뿐인데, 온몸의 시원함이 느껴지듯 청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더 가까이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계곡물에 손과 발을 담그고 있을 때 소리가 들렸다.


"계곡물에 들어가면 안돼요. 어서 나오세요. 제가 위쪽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까지 계곡에 있으면, 그때는 벌금 뭅니데이!"


 그분은 소리길탐방센터에서 우리에게 가야산국립공원 안내도를 나눠주셨던 국립공원직원분이셨다. '헉'. 안내도에 봐도 분명 입수금지라고 명시되어있지 않았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순간 아이들의 표정은 계곡물처럼 차가운, 아니 급속냉동된 고등어처럼 꽁꽁 얼어붙어있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며, 몇 번이나 인사를 드렸다. 두타연 입수사건 (19화 무시래기 무시래이) 이후, 우리 아이들과 나는 어떤 곳을 가더라도 주의사항을 잘 살피고 있었는데, 이번엔 가족 모두 입수금지지역에 발을 담갔으며 심지어 국립공원 직원분께 발각이 되었으니 아이들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벌금은 얼마인지 걱정을 하며 계곡물이 뚝뚝 떨어지는 발을 대충 털어내고 아주 빠르게 양말과 신발을 신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 질주하듯, 우린 가쁜 숨과 함께 계곡에서 소리길 위로 올라왔다.


 소리길 안내책자의 주의사항에도 입수금지는 나와있지 않았던 터라 궁금해서 알아보니, 국립공원 내 계곡은 불규칙한 수심으로 정확한 깊이를 없고, 일부 구간은 소용돌이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물놀이가 허용된 안전구역에서만 물놀이가 가능하고, 특히 국립공원의 폭포는 사고 위험이 커서 연중 입수가 불가능한 출입금지지역이었다. 국립공원직원분께서 그때 길을 지나가지 않으셨다면, 우린 지금까지도 사실을 모르고 넘어뻔했다.


(이 글을 빌려, '경고'만을 주셨던 국립공원직원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음부턴 허용된 지역에만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ㅠㅠ)

 

 우린 잠시 소리길 바위에 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진 소리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그때 우리 눈앞에 부처님이 누워계셨다. 박상희 님의 '바위에 갇힌 부처를 보다'라는 작품.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우리와 부처님의 만남이었다. 어떻게 이 순간에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실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웃음이 났다. 정말 '죄짓고는 못 산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어느 순간 환하게 빛이 났던 연못과 연못의 한 중간에 자라고 있는 나무 한그루가 눈에 띄었다. 연못 앞에 있던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의 내용을 글로 옮겨보겠다.


옛날 어느 절에 덕이 높은 스님이 제자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중 한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 마침내 몹쓸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하루는 스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난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슬피 울며 참회하고 있었다. "스승님,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스님은 가여운 생각으로 그 제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여 물고기의 몸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다음생에는 성심껏 공부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자신의 등에 난 나무를 깎아 물고기 형상으로 만들어 부처님 앞에 매달아 놓고 쳐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자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며 물고기에는 해탈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이 될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물고기 모양을 딴 목어(木魚)가 만들어졌고, 차츰 쓰기 편리한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었다. (출처. 중수교원청규)

 

 이곳은 목탁의 유래가 담겨있는 연못이기도 하지만, 이곳의 습지는 소(小) 생태계를 관찰할 있는 '생태연못' 이기도 하다. 작은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공간 안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것은 생명계의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고, 한참 동안 습지 안에 있는 수백 마리(?)의 많은 올챙이를 관찰하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자연 안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의 모습 또한 나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로 가는 징검다리에서 하마터면 습지에 빠질뻔한 둘째아이.



 소리길을 걸으며 잠시 계곡에서 살짝 벗어나 온전한 숲으로 들어갈 때, 조용한 숲 속에 새소리만 들리다 갑자기 투둑투둑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멈추면 소리가 들리지 않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다시 소리가 들렸다. 숲 길을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니 갈색털 등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다람쥐'였다. 바위 위로, 나무사이로 이리저리 다니는 다람쥐를 보며 아이들은 반가워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있다 느껴졌지만 움직이는 다람쥐를 보니 자연은 볼수록 신기하고, 숲 안에서 다람쥐를 만난 우리가 행운이라 느껴졌다.



 소리길하면 산골짜기를 흘러내리는 계곡을 빼놓을 수 없는 만큼, 3구간이 시작되면서 '홍류동 계곡'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계곡에 붉은 색채가 비쳐 흐른다 하여 홍류동이라 이름 붙여진 계곡으로, 폭포처럼 세차게 흐르는 계곡의 물줄기를 보며 물소리를 함께 듣고 있으니 뿜어내는 멋스러운 계곡의 운치가 느껴졌다.   

홍류동 계곡은 영산교에서 해인사로 이어지는 5구간의 초입까지 볼 수 있다. 그렇게 홍류동 계곡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숲 길을 지나 드디어 소리길의 끝, 해인사 일주문에 도착했다.


 

 해인(海印)사는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 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되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藏經板殿)'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조선 전기의 서고로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두 개나 품고 있기에 소리길을 모두 걸었다고 해서, 해인사를 둘러보지 않을 수없다.

우리가 걸었던 소리길을 '가야산 소리길'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해인사 소리길'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산을 품고 있는 해인사도 아름답기에 소리길의 끝을 해인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하여 우리의 소리길 걷기는 끝이 났다.



 이제 버스를 타고 우리가 출발했던 곳으로 가야 할 시간, 해인사 아래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걸어왔던 가야 방면(소리길 방향)으로 표를 끊고 대장경테마파크 주차장으로 이동을 해 본다. 버스가 도착하기 5분 전, 어떤 아저씨 한분이 오시더니 순서대로 요금을 받고 버스표를 주셨다. 버스를 타는 사람은 거의 열몇 명 정도 되었고, 무조건 현금결제만 가능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렸다. 우리는 제일 마지막으로 버스표를 끊었고 겨우 버스를 탔는데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천 몇백 원을 더 낸 것 같다. 내가 뺄셈을 잘못했네."


 버스는 이미 출발했고 남편은 돈을 더 낸 것도 더 낸 것이지만, 뺄셈을 잘못한 것이 허무하다고 했다. 아이스크림은 그렇게 손을 떨면서 계산하더니... '내가 봤을 땐 계산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돈 하고는 인연이 아니 우연도 없는 걸로 해야 될 것 같다...'

(※ 29화가 되어서야 밝히지만, 남편은 수학교육을 전공한 수학교사이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우리가 출발했던 대장경테마파크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아이들은 "어? 어! 우리 저기 걸었는데?"라는 말을 했고, 10분 후 버스에서 내리며 나에게 허무하다고 했다. 오후 1시 40분 정도부터 5시 54분까지 4시간 14분 동안 걸었던 시간들이, 버스를 탄 지 단 10분 만에 시작지점으로 왔던 상황이 아이들에게 허무함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허무하지? 엄마도 그래. 우리 진짜 열심히 걸었는데, 그치?"

 "10분 만에 도착하니까 너무 허무해요. 엄마."

 "맞아. 그래도 소리길 걸으면서 재밌었던 일들도 많았잖아. 오디 먹으면서 입이 시커멓게 변해서 서로 웃고, 계곡물에 들어가서 아저씨한테 경고받고, 아빠가 수학쌤인데 뺄셈을 잘못해서 버스비 계산도 틀리고 말이야. 소리길의 재밌는 추억이지 않아?" ^^




허무함을 허무는 우리의 걷기


4시간 14분 동안 소리길을 열심히 걸었고

버스를 타고 10분 만에 내려오며  

큰 '허무함'을 느꼈지만,

소리길을 걸었던 소중한 추억들을 생각하며

허무한 마음을 허무는 우리가 되었지.


지금보다 더 고독하고 고단한 인생이란 길을 걷게 되어

크나큰 허무함을 느낄지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걸었던 길들과 소중한 추억들을 생각하며

허무함의 마음을 허무는 우리가 되자.






[epilogue]



소리길을 걷고 난 그날 저녁, 첫째 아이가 적었던 일기 중.
 며칠 전, 우리 가족은 이번 현충일휴무에 어딜 갈까? 의견을 냈던중, 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보지 못했던 길 중 하나가 떠올랐다. 그 길은 바로 '가야산 소리길'이다. 이 길은 합천 대장경 테마파크에서부터 해인사까지의 길을 말하는데 계곡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엄마께서 몇 달 전부터 가고 싶어 하셨던 길이라 쉽게 말을 못 꺼냈는데 이런 아이디어를 나 혼자서만 알고 있기엔 양심이 너무 찔려 말해버렸다. 그렇게 6월 6일 현충일에 우리 가족은 '가야산 소리길'을 걸었다.



 엄마. 이번 현충일 연휴에 소리길은 어때요?



 라는 말을, 그날 저녁에 쓴 아이의 일기를 보고 나는 그제야 아이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엄마가 가고 싶어 했던 길이라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고, 아이는 좋은 아이디어를 혼자만 알고 있기에 양심이 찔려 엄마에게 얘기했던 것이다. 아이에 대한 고마움은 물감처럼 나의 온몸으로 번져갔다. 내 코끝은 찡해졌고, 내 눈엔 눈물이 고였다. 평소, 엄마의 말과 마음소리에 항상 귀 기울이고 있는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과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나의 미안한 마음이 서로 교차했다.


 소리길에 들어서며, 해인사 소리길이라고 적힌 큰 바위 아래에 [소리길이란. 우주만물과 소통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생명의 소리, 우리가 추구하는 완성된 세계를 향하여 가는 깨달음의 길이며,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세월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여 '소리길'이라 함]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보았다.


 오늘 아이와 함께 걸었던 소리길은 아이의 '양심'으로 시작하여, 아이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엄마의 '반성과 다짐'으로 끝을 맺는, 소리(蘇利) 길의 또 다른 의미였던 '이로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임에 분명했다.


"이제부턴 엄마가 너에게, 너의 마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게. 쫑긋! "



 이번만큼은 '소리길! 소리길!'이라며 티 내지 않았고 연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듬뿍 철이 든 너희들이 철없는 엄마의 소리에 귀 기울여 준 덕분에, 엄마가 너희들과 소리길을 걸을 수 있었어. 더운 날씨에 걷는 것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엄마와 함께 동행해 주어서 나연이 나예에게 너무 고마워.






낯선 도시의 첫 걷기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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