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라는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집안정리만 했지, 내 마음과 내 생각의 정리는 소홀했던 적이 많았다. 집안을 쓸고 닦 듯 내 마음도 쓸고 닦는 일이 필요했고, 냉장고를 비우고 채우듯 내 생각에도 비우고 채우기가 필요했다. 일상을 보내며 내 마음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가끔은 정적을 느끼고 싶을 때 나는 아이들과 '템플스테이'를 찾았다.
나는 무교이고절실하게 어떠한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즈넉한 절을 찾아 하루머물며, 목탁을 치며 기도를 올리는 스님의 말씀에 무슨 뜻인지는 자세히 알 수없으나,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고 나의 바람이 담긴 기도를 올리면 내 마음이 한결 차분해져서 좋았고,새벽예불과 새벽공양 후 아이들과 조용한 새벽 숲길을 걸으며 자연을 느끼는 그 시간또한 내 생각이 맑아져서 좋았다.
(왼쪽) 2019년 대구 동화사 , (가운데) 2021년 대구 동화사 , (오른쪽) 2023년 순천 송광사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템플스테이를 찾았던 그 시기마다 나에겐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존재했고,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위로받고 싶어서 템플스테이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말을 할 수 없는 절 안의 불상을 보며 무슨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걸까. 또 불상을 보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신기했던 건 템플스테이를 하며 불상이 나에게 어떠한 얘기를 해 줄수도 없고, 해준 적도 없지만 템플스테이를 다녀와서는 무언가 모를 가벼움을 느꼈다. 자연 안에 절이라는 고요한 공간에서 오롯이 내 마음에 집중했던 시간들은 나를 진정시켜 주었고 또 답답했던 내 안의 문제들을 차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처음보다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 하면 이 분을 빼놓을 수 없다. '원효대사'.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신라의 원효대사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고 하던 도중 날이 어두워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차에 동굴로 들어가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어서 거기에 든 물을 벌컥 들이키며 "아. 그 물 참 달고 시원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날이 밝은 뒤 일어나, 주변을 본 원효대사는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동굴의 정체는 파묘된 무덤이었고, 그가 마셨던 건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놀란 원효대사는 구토를 했는데, 썩은 물도 목이 마를 때 모르고 마시니 달았다는 것에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깨달음을 얻고는 스스로 유학을 포기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원효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깨달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준다.
템플스테이 대신 아이들과 걷기 여행을 하며, 나 스스로 지어낸 불안한 마음과 나 스스로 지어낸 복잡한 생각을 날려버리고, 평온한 마음을 짓고 싶어서 그곳을 찾았다.
경주 '남산'
오늘 새벽까지 비가 내려서인지,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로 들어서는 느낌은 '남산 습식사우나'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뭔가 '목에 수건 하나를 둘러야 하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습한 공기가 땅에서 올라왔고 간간히 부는 바람조차 축축했다. 피부가 쩌억쩍 달라붙고, 아직 제대로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의 땀샘은 활짝 열렸다. 그렇게 열기를 품고 있는 내 온몸이, 습기를 품고 있는 '남산'안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야자매트가 깔린 푹신한 길 옆으로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있고구불구불 옆으로 뻗어있는 소나무들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소나무군락지의 삼릉숲이 남산에 온 우리를 반겨주듯 그윽한 운치를 자아냈다. 얼마 전까지 건조한 날씨로 전국 곳곳에 산불소식이 전해져 안타까운 마음이 컸는데, 새벽까지 내린 비로 물기를 흠뻑 머금은 소나무는 활기도 함께 머금은 듯, 더욱 짙고 푸르게 보였다.
아름다운 소나무숲에 마음이 팔려 한참 동안 숲을 구경하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 같은, 소나무숲의 가장자리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삼릉' 곁으로 다가갔다. 앞에서 보면 하나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세 개의 무덤이다.
왕릉 사적 제219호로 신라 8대 왕인 아달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 씨 세 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삼릉은 1953년, 1963년 두 차례 도굴을 당하여 내부 부장품을 통한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 700년의 차이가 있고 신라 초기에는 대형무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여 세 왕들의 무덤이라는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왼쪽)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오른쪽)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
삼릉을 품고 있던 아름다운 소나무숲과 뿜어져 나오는 소나무향에 도취하며 걷는 사이 내 눈앞에 소문으로만 듣던 귀한 '남산의' 그리고 '신라의' 문화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산은 신라인들의 문화가 깃들어있는 역사의 산으로 인정받아 2000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실제로 산을 오르며 여러 석불을 보니 신라인들의 불교 신앙세계가 신기했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불교는 비단길을 따라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이후 삼국의 고구려 소수림왕, 백제 침류왕, 신라 법흥왕 때 전파되었다. 삼국의 불교는 이후 일본에도 전파되었으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하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석불들은 8~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투박하면서도 인자한 석불들을 통해 불교를 향한 신라인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신라인들이 왜 이곳, 산 곳곳에 석불들을 만들어 놓았을까?"라는 물음은 계속되었고, 여러 이유들을 생각해 보며 남산 북쪽에 있는 봉우리인 금오봉(468m)을 향해 많은 돌계단과 오르막의 흙길을 올랐다. 땀은 물 흐르듯 흘렀고, 오르면 오를수록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가 우리와 가깝게 들렸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 듯, 우린 아주 반갑게 얕은 물들이 흐르는 작은 냉골의 물줄기를 마주했다. 산을 오르며 힘들었지만, 시원한 계곡물과 사람들이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나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차가운 계곡물 안에서 평평한 돌 하나를 찾았다. 신라의 석공들처럼 돌부처를 새기고 만들지는 못하지만, 작은 돌하나를 아주 정성껏 쌓아 올렸다. 혹여나 다른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이 무너질까, 작은 돌하나를 잡은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작은 냉골에 땀인지 계곡물인지 모를, 흥건한 손을 담그며 쌓아 올린 돌탑과 함께 쌓아 올린 내 바람을 생각했다
'지금처럼 잘 버틸 수 있게, 너그럽고 슬기로운 마음을 지어내자. 어질게 살자.'
어떻게 삶의 매 순간이 좋을 수 있을까. 가끔은 넘어질 수도 있잖아.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버티기만 해도 괜찮지 않아? 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잘 버틸 수 있게, 어질게 살기를 바랐다.
그리곤 내 마음을 편하게 지어내려 비우고 또 비우며 돌탑을 쌓 듯, 한걸음 한 계단에 집중해서 산을 올랐다.
바둑바위에서 바라본 경주의 모습
파도가 밀려오 듯, 나무사이로 부는 바람에 숲내음이 내 콧속으로 자주 밀려들 때 나는 직감했다. 이제 뭔가 트인 곳이 나타날 거란 걸. 아니나 다를까 넓게 펼쳐진 바위가 곧 내 시선에 들어왔다.
작은 냉골의 물줄기를 지나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오르막길을 걷던 중간, 넓게 펼쳐진 이곳.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뒀다는 바둑바위다.
바둑바위에 서니, 오늘따라 무겁게 보이는 구름아래로 망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논. 밭과 작은 마을들 그리고 멀리 경주의 시가지를 잇는 형산강까지 탁 트인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경주를 정말 많이 왔었다. 계절마다 한 번씩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바둑바위에서 경주를 바라보며 느꼈던 그 순간은 평소 내가 경주를 여행하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누군가 '남산을 올라보지 않고 경주를 보았다고, 신라를 안다고 하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 맞다. 나는 이제 경주를 그리고 신라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
바둑바위를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남산은 나에게 조금 더 쉬어가라는 듯, 느닷없이 내 눈에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보여주며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주변의 소나무들이 부처님을 지키고 있는 느낌이 드는 석불이다. 삼릉계곡 마애 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은 자연암벽 6m 높이에 새겨진 불상으로 남산의 좌불(座佛) 중, 가장 크다. 이 석불 또한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석불과 자연이 이토록 훌륭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니 그 시대 신라의 석공들이 대단하기만 하다.
평소 산을 오르고 숲길을 걷는 속도보다, 우리가 남산을 걸을 때 훨씬 더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한, 먼발치에 있는 돌부처를 보며 이곳을 지나감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경주 남산 금오봉(468m) 정상 표지석
드디어 경주 남산 북쪽의 봉우리, 금오봉(468m)에 도착했다. 삼릉숲에서부터 쉬엄쉬엄 걸어 두 시간정도 걸렸다. 우린 정상석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준비해 온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오늘 남산을 오르며 석불도 많이 보았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곳 어디를 가도 외국인과 마주할 수 있지만, 아이들과 산을 오르며 마주했던 적은 처음이라,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남산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경주이기에, 그 안의 소중한 우리의 유산인 남산을 올랐다는 것이 매우 가치롭게 느껴졌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이제 금오봉에서 용장골로 하산을 시작해 본다. 금오봉 정상석 뒤편의 오솔길로 내려가 남산진입도로까지는 길이 꽤 무난하다. 하지만 남산진입도로가 끝나고 나서는 '급경사구간, 미끄럼주의'라는 표지판이 몇 개씩 걸려있을 만큼 모난 바위로 험하디 험한 길을 걸어야 한다. 두 손으로 나무를 잡아가며, 바위를 짚어가며 걸어간 그 길의 끝엔 시원스레 뚫린 하늘과 맞닿은 절벽에 석탑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구름이 지나가다 자칫 탑에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절벽 끝에 우뚝.
남산에 오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리고 볼 수 없는 용장사곡 삼층석탑의 모습은 '퀄(Quality)'이 압도적이었다. 높이 4.5m의 아담한 탑이지만 남산의 능선과 경주의 모습들을 한 폭에 담아내니 장엄함 그 자체였다.
남산의 석불, 석탑은 평범한 것이 없었다. 골짜기마다 존재하는 신라 석공들의 작품들로 경주 남산을 경주의 노천박물관이라 부를만하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용장골로 내려오며 보았던 마지막 석불인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머리가 유실되었고 몸체만 남아있었지만 매끈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석불에 나도 첫째 아이도 감탄했지만, 둘째 아이는 또 부처님의 목이 잘렸다는 얘기만 계속했다... (너를 어찌할꼬...)
그렇게 둘째 아이에게 통일신라시대에 대해, 신라사람들에 대해, 얘기를 하고 또 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남산의 소나무숲이 만들어낸 또 다른 바위들의 이끼숲을 지나, 용장계곡의 바위들을 지나, 4시간 20분 만에 드디어 용장마을로 무사히 내려왔다.
경주 남산은 큰 의미가 있는 공간의 '숲' 임에 틀림없다.
신라의 석공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석불과 석탑을 만들었기에, 자연 안에 천년 역사의 신라가 존재하고, 천년의 역사가 이어져, 자연 안에 머무는 우리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준다. 그렇기에 구슬땀을 흘리며 석불과 석탑을 조각한 신라의 석공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올린다.
그들은 무엇을 바랐을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신라'인(人)'들은 부처의 세계를 열망(熱望)했지만,
나(본本 '인仁')는 사람답게 그리고 어질게 살기를갈망(渴望)한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신라인의 염원(念願)이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염원(念願)이 아닐까.
'습식사우나'를 연상시킬 만큼, 많이 습한 날씨와 미끄러운 돌들로 경주 남산에 오르는 것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엄마와 함께 동행해 주었던 나연이 나예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스물일곱 번째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사진출처. 경주국립공원공단 / 왼쪽사진의 여러 갈래길 중, 오른쪽 사진의 노란색 코스로 남산을 걸어보았습니다.
경주 '남산'을 둘러볼 수 있는 등산로는 여러 갈래의 길로 나뉘어있어요. 저와 아이들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