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여덟

진지하게 발끈하지만 마무리가 어설픈 사람

by 주원

오늘은 발끈할 일이 두 번이나 있었어요. 저는 제 의견 말하는 걸 어려워해요. 불합리한 부분에 의견을 개진고 싶은 마음의 강도에 비해 용기와 화술이 약해서 머뭇거리다가 참는 날이 더 많아요. 그런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요. 사안이 민감하기도 했고요.


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시민대상 영화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그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독백극을 했었는데 그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걸 발견했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프로그램 신청서를 쓰면서 개인정보이용 동의는 했지만 결과물이 이런 식으로 대중에게 공개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내부 결과보고나 단순 홍보정도로 이용될 거라 예상했는데, 독백 전체 영상이 참여자별로 공개 됐더라고요. 초상권을 포기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너무나 적나라하게 제 얼굴과 속마음이 까발려진 것이 창피했어요. 그리고 제 진심과 이야기가 안일하게 다루어졌다는 데 화가 났어요. 유튜브에 올리기 전에 언급이 있었더라면 조율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어요. 재단에 전화를 걸어 영상 삭제를 요청했고 영상은 몇 시간 후에 삭제되었어요.


요목조목 준비한 말은 많았는데, 처음에는 말보다 마음이 앞서 로보트처럼 준비한 말만 빠르게 읊다가 여유로운 상대방의 반응에 기가 눌려 뒤에는 말 어미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는 을의 자세가 되었요.


요목조목 따박따박 법정 드라마 주인공처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화를 끊고서 이런 메모를 해뒀어요.

의견을 전달해야 할 때, 감정 덜어내고 전달해야 하는 내용만 명확하게, 소통이 일방적이지 않게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예의 바르게, 그러나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강력하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잘못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감사인사, 사과하지 않기


'영상 지워달라는 요청만 간단히 하면 되는 문제를 나 혼자 크게 키워 생각했나?, 내가 예민하고, 민감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의심은 거두기로 했어요. 제가 영상이 그런 식으로 공개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그 과정이 옳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화술이 어설프더라고 제 권리는 제가 지켜야지요.




오후에 있었던 회의에서 다시 한번 발끈할 일이 있었어요. 딱 한번 발언했는데 어설프게도 목소리에서 제 격양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어요. 제가 분노한 지점은 일부 사람은 애초부터 전체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의무는 동일하게 이행하라는 규칙을 강요하고, 문제해결에는 효과가 없는 명목상 규칙개정안을 가져와서는 시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모습이었어요. 일말의 기대가 산산조각 났어요. 그간 제가 가진 문제의식과 의견을 반영한 개정방안을 만들어 전달하기도 하고, 일부 구성원과 소통하며 일말의 변화를 기대했었는데, 안 되는 거였어요.


물론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변화가 아주 없지는 않았고,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요. 사안을 글자로만 보면 결론은 찬성/반대로 단순해지지만 3D로 얽혀 있는 이해관계, 여러 사람의 사정을 살피자면 끝이 없잖아요.


어쩌면 이것도 일상의 정치라고 볼 수 있겠네요. 조직 안에서 효과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사람을 설득해서 여론, 힘을 키우고 유리한 결정을 얻어서 원하는 변화를 만드는 게 정치라면 참 어렵지만 유용한 기술이란 생각이 듭니다. 고도의 전략, 심리, 언변 등등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겠네요. 정치인들이 새삼 달리 보입니다.




감정 요동이 태풍처럼 몰아쳤던 하루라 저녁에 맛있는 거 먹었습니다. 안 매운 마라탕이랑 초콜릿과자. 덕분에 발끈했던 마음 토닥이고 달달하고 기분 좋게 자리에 니다. 포근한 밤 보내세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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