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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마흔 아홉

그냥 하지 말까?

by 주원

자정까지 접수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서 작성하다가 브런치 업로드를 놓쳤습니다. <백 마흔 여덟>까지는 어떻게든 날마다 업로드를 지켜왔는데, 이번 편은 지각입니다. 벼락치기는 막바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장점이 있지만 같은 마감이 2개 이상이 될 때는 집중할 수 있는 하나 외에 나머지는 버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예전에는 밍기적거리며 할 일을 미루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굴려보곤 했는데, 요즘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미뤄둡니다. 그러다 막바지에 이르러 일을 하려고 노트북 앞에 앉으면 벼락은커녕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해집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냥 하지 말까?'


'단념'이라는 단어가 재빨리 따라옵니다. 당장 따르고픈 유혹이지만 그래도 책상을 떠나지 않고 버텨봅니다.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 모르겠습니다. 시험기간마다 그 많은 과목을 벼락치기로 넘기곤 했는데, 그때 저를 추동하던 힘은 어디로부터 왔던 걸까요? 옆에 친구들이 그렇게 하니까? 선생님한테 혼나기 싫어서? 칭찬받고 싶어서?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어서? 시험점수를 잘 받겠다는 목표 이전에 과정을 독려하는 힘, 목적 같은 게 있었을 텐데 기억나지 않습니다.


학교를 벗어나면 같은 과정 안에서 경쟁하는 동급생도, 혼을 내거나 칭찬을 하는 선생님도 사라집니다. 경쟁자는 가늠할 수 없이 많고 강력하고, 혼을 내는 사람은 없지만 불합격, 탈락, 수준미달이라는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수능시험, 수행평가, 보고서 제출, 쪽지시험, 단어시험 등등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도 거의 없어집니다. 무언가를 할지 말지는 오롯이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하기 싫은 일을 해냅니다. 사실 그 하기 싫은 일이란 것도 누가 시킨 게 아닙니다. 제가 찾아서 할 일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제 앞에 가져다 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프로그래밍된 인간인가 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할 일을 찾고, 찾아둔 걸 바로 처리하지 않고 미루면서 스트레스받다가, 막바지에 쫓기듯 하고 나서 미흡한 완성본을 보면서 마지막까지 스트레스받는 인간. 미리미리 하지 않음을 후회하고 개선을 다짐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러면 그렇지로 마무리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라는 말이 있다던데, 극과 극은 통한다 하였으니 저는 이미 하늘의 명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기대 말고 잠이나 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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