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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여든

느슨한 약속

by 주원

약속인 듯 약속 아닌 약속 같은, 느슨한 약속을 할ㅇ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A: 우리 다음 주에 만나요.
B: 좋지요! 저는 다음 주 수~금 저녁시간 다 가능해요. 가능한 시간 알려주면 제가 맞출 수 있어요.
A: 그럼 제가 연락드릴게요.
B: 네!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 보다는 분명 약속에 가깝지만 정확한 일시와 장소가 특정되지 않아 약속이 확정되었다고 보기도 힘들어서 약속에 대비하기도 무시하기도 어려운 혼란스런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A의 입장은 어떤 걸까요? 다음 주 수~금요일에 다른 일정이 예정되어 있어 당장 확답을 주기에 어려운 상황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B는 어떨까요? 처음엔 연락을 주겠지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릴 겁니다. 그러다 다음 주 화요일쯤 되면 은근히 연락을 의식하게 되겠지요. 다음날부터 약속 범위가 시작되니까요. 선약이라면 선약이니 다른 일정을 잡지도 못 않고 어정쩡한 마음으로 A의 연락을 기다리겠지요. 그렇게 화요일, 수요일 시간은 흘러 목요일쯤 되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던 A의 의중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나? 많이 바쁜가? 약속을 잊어버렸나? 내일은 연락이 오려나?' 금요일이 되면 슬슬 불편한 마음이 고개를 듭니다. '이 사람은 뭐지?' 다른 한편에서는 차라리 연락이 오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도 생각합니다. 마지막에는 이 애매한 약속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해지고 싶은 마음만 남습니다.


결국, A에겐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B가 먼저 A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습니다. A와 B 모두에게 그 약속이 중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서로에게 만나도 그만, 만나지 않아도 그만인 사람이었던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간절하지도 소중하지도 않기에 애초부터 빠져나갈 구멍이 커다란 모양으로 약속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증발해 버리기를 바랐던 겁니다.


저는 때때로 A이면서 B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이런 허울뿐인 약속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그마한 마음속 신뢰가 풍화되면 곤란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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