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를 뛰었다. 내 생에 가장 긴 시간, 긴 거리를 뛴 날이다. 풀마라토너 급이었던 근심, 걱정 무색하게 큰 고비 없이 완주했다. 사람, 풍경 구경도 많이 했지만 뛰는 동안 내 몸, 마음, 생각을 살폈다. 여러 감각과 통증이 오갔고,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생각은 발보다 빠르게 여기저기로 튀었다. '자전거 타시는 분들은 왜 저렇게 날카롭게 말을 할까?'생각하다가 예전에 기르던 개를 떠올리며 너처럼 잘 뛰게 해 달라 부탁을 하기도 하고, 멈추지 않는 것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혹시 달리기의 매력이란 게 사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가?
달리기가 끝나고 감상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했다.달리기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며칠 전부터 기운이 없었다. 마라톤이 다가오고 있었고 마음에 부담이 점점 커져 지레 몸이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몸을 사렸다. '나만 완주하지 못하면 어쩌지?' '나는 2km 정도가 알맞은 거 같은데, 10km라니 세상에나'
그러나 마라톤 당일은 오고야 말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참가자 부스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사람들 따라 줄에 섰다가 엉겁결에 발목이랑 무릎에 테이핑도 받았다. 테이핑 해주신 분이 관절을 짚어가며 정성스레 꽁꽁 쫀쫀 타이핑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며, 또 활기차게 외쳐준 '파이팅' 소리에 용기를 얻었다. 마리톤 대회장의 분주한 분위기에 스며든 듯 점점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팀원들과 준비운동을 하면서 다시금 걱정이 올라왔지만 응원을 한 마디씩 나누며 좋은 기운을 북돋았다.
출발!
시작하자마자 나는 같이 간 팀원 스무 명 중 맨 마지막으로 뒤쳐졌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앞으로 나갔다. '어쩌지?' 불안함이 올라왔지만 나는 내 속도로 갈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동네에서 달리던 속도를 유지했다. 멈추지만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이웨이. 곧 내리막 길이 나왔다. 반가움보다 돌아올 때 마주할 힘겨움을 미리 걱정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걷는 사람이 생겼다. 나도 누군가를 앞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2km를 넘어설 때 즈음 앞서가는 팀원들이 보였다. 쉬지 않고 뛰다 보니 거리가 좁혀져 나란히 달리게 됐다. 응원의 말을 나누고 앞서 달렸다. 멈추지 않으니 앞서간 사람을 만나게 됐다. 내 시야에서 보이는 순위 탈환에 마음을 덜 쓰게 됐다. 우리는 결국 출발지점에서 만난다. 나하고만 사이좋게 잘 달리면 되는 거다.
3km를 지날 즈음 반환점을 돌아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복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나시에 짧은 바지, 오래 달렸을 것으로 보이는 근육까지. 평온한 표정은 거의 없었고 힘을 짜내 혼신의 힘으로 달려가는 진지하고 힘겨운 표정을 보았다. 시간 단축을 목표로 하는 분들이니 마지막 2km에 전력을 다하는 중이셨으리라. 등만 보고 가다가 마주 오는 얼굴을 보니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팔을 요렇게 살랑살랑 양쪽으로 흔드시는구나, 저분은 많이 힘드신가 보다, 상체가 꼿꼿하시네' 선두권이 빨리 지나가기 전에 요목조목 살폈다.
구경도 잠시, 아직 갈길이 7km나 남은 것. 끝 모를 막연함이 지침을 덮치려 할 때마다 시선을 양쪽으로 멀리 두고 풍경을 보려 했다. 전날 마라톤 걱정이 크다는 내게 친구는 가을 풍경 보러 간다는 생각으로 다녀오라 했다. 멈춰 서고 싶을 때마다 주변을 둘러봤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 한강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 배드민턴 치는 아이들, 단풍 진 형형색색의 나무,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나와 줄지어 뛰는 사람들.
반환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반환점을 향해가는 사람보다 더 많아진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무리 가도 5km 반환점이 나오지 않았다.실망감에 지쳐가던 중에 어! 반대편에서 팀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 나도 5km 지점에 도착했다. 천천히 뛰며 급수대에 다가가 물 한 컵을 집어 들고 입안에 물을 넣었다가 뱉어냈다. 이제 온만큼만 돌아가면 된다! 초행길을 갈 때는 오래 걸리지만 돌아올 때는 같은 길이라도 체감이 빨라지지 않던가. 마라톤도 그러하기를 바랐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서가고 또 걸어가고 나는 내 속도로 뛸 뿐이고.
6km쯤 되었을 때 오른쪽 발목에서 불편감이 느껴졌다. 아직 갈길이 멀었는데. 슬며시 걱정이 올라왔지만 달리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무릎을 살짝 밖으로, 발가락 펴고 발을 가볍게, 어깨 힘 빼고, 척추를 길게, 몸통은 많이 움직이지 말고,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가볍게 가볍게. 구부러지는 상체를 세우고 아픈 발목보다는 발가락, 발바닥에 신경 쓰며 통통통 가볍게 뛰어보려 했다. 플라세보 효과라도 좋으니 오른쪽 발목과 무릎에 한 테이핑이 나를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7km 길을 되돌아가며 아까 보았던 배드민턴 치는 아이들, 한강공원에 소풍 나온 사람들, 유람선이 떠 있던 한강을 보았다. 쉬지 않고 하염없이 뛰다 보니 팀원들도 만나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이 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유아, 어린이, 유모차 탄 아이와 함께 달리는 사람, 할아버지와 손자, 장애인 그리고 손목에 끈을 연결해 같이 달리는 사람, 가족, 연인, 친구, 동호인 등등. 내 바로 앞에서 달리던 할아버지는 청소년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고개를 들고 100m 앞을 보라고 알려주셨다. 나도 그 아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8km, 500m 앞 음수대를 기다리며 달렸다. 그런데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흐헉 흐헉- 곧 고꾸리질 것만 같은 숨소리에 내 숨도 덩달아 가빠지는 것만 같고, 온신경이 그 소리에 쏠려서 내 몸상태, 페이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거리를 벌리기 위해 힘을 내-어 속도를 높여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가지 못해 음수대에서 익숙한 숨소리와 재회했다. 이렇듯 멈추지 않으면 만나게 된다. 힘듦을 공감하며 응원하는 마음을 보냈다.
"이제 2.5km밖에 안 남았습니다. 힘내세요. 파이팅!" 진행요원의 응원을 들으며 그럴 리가 없는데 8.5km는 온 거 같은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마음이 요동쳤다. "이제 1.5km 남았습니다!" 귀도 지쳤는지 잘못 들은 거였다. 순간 마음이 안정되며 1km를 번 느낌이 들었다. 10km 중 가장 크고 짧았던 위기의 순간이자 단순한 기쁨을 맛본 시간이었다.
8km가 넘어가자 걷는 사람이 많아졌다. 중간중간 파스를 뿌리는 사람도 보였다. 걷다 뛰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다시 뛰는 결심이 쉽지 않음이 느껴졌다. 한번 쉬어간 사람들은 얼마가지 못해 다시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나는 한번 멈추면 다시 달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의지가 약한 나를 알기에 멈추지 않고 뛰었다. 뛰면서 생각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어슬렁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수월하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9km 오르막, 매끄러운 시작을 열어줬던 길이다. 길은 길이려니. 오르막 내리막보다 남은 거리가 중요했다. 이 길을 지나면 끝이 온다. 마음은 도착선에 보냈는데, 가도 가도 길만 나왔다. 1km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직선 길이 나오길래 힘을 짜내 속도 높여 달렸는데 그 끝에는 화살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회전 또는 반전. 숨이 명치까지 차올라 헐떡거리며 힘겹게 달리고 있는데 옆으로 팀원이 다가왔다. "도착선까지 뛰죠!" "좋아요!"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도착지점까지 100m 전력질주를 했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뭐지? 바로 옆으로 나비넥타이를 한 신랑, 베일을 쓰고 부케를 들고뛴 신부, 신혼부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도착!
느낀 점: 앞으로 하고 싶은 게 생기거들랑달리기 하듯 더디더라도 힘겹더라도 멈추지 말고 가봐야겠다. 쉬엄쉬엄 풍경도 봐가면서.
테이핑 해주셨던 분이 기억에 남는다. 땅바닥에 한쪽 무릎이 닿도록 쪼그리고 앉아 몸을 구부려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무릎, 발을 만지고 들어 올린 뒤에 양손으로 테이프를 짱짱하게 당겨 떨어지지 않도록 피부에 꾹꾹 눌러 붙여주는데 그 정성이 감사하면서도 힘들지 않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이 테이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줄이 꼬리를 물고 S자로 겹쳐져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힘들어서 어떡해요." 뒤를 돌아 줄 선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활기찬 표정으로 "오~ 좋은데요. 완전 신나요!" "신나요?" "네, 저는 완전 신나요. 오늘 파이팅 하세요!" 나는 그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표정과 목소리에서 진심인 게 느껴졌다.
활기찬 응원을 들으니 마라톤 걱정으로 천근만근이었던 마음에 가뿐해졌다. 그래,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지. 많든 길든 내가 재밌고 신나면 된 거지.
나는 왜 모든 걸 힘들고 고단한 것이라고만 생각할까, 타인의 직업적 보람과 즐거움을 내 마음대로 판단한 오만을 반성하며. 탄탄한 테이핑과 산뜻한 활력을 전해준 그분께 감사를.
아, 그리고 콧물이 큰 걱정이었는데 마라톤 하는 동안 콧물이 거의 나지 않았다. 몸을 데워 안팎의 온도차를 줄여준 준비운동 덕분인지, 날이 좋아, 날이 적당 해서였는지 건조한 가을공기 영향인지 복합적이겠지만 아무튼 참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