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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바꾼 믿음의 증거
_해미순교성지

더위도 이긴 숭고함

by 자유인

2025년 7월 31일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서산을 향한다.

수많은 천주교 순교자가 나온 아픔의 장소 서산소재 해미면 성지에 다다랐다.


미리 예약을 못해 외부에 위치한 시설만 볼 수 있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마음 숙연해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적막한 입구를 지나 동서양의 조화가 멋스러운 성당 옆에 조성된 3명의 시복상이 맨 앞으로 다가온다.

IMG_3960.JPG (시복상)

해미 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다.

이름이 남아있는 순교자는 132명이지만 대부분은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들 가운데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시스코, 김진후 비오가 2014년 8월 16일 프란시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되었다.

전형적인 양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신분과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천주교에 귀의하고 죽음도 마지않았던

숭고함에 고개를 떨군다.

목숨보다 중히 여겼던 유학을 뒤로하고 믿음을 가지게 만들 만큼 그 무언가가 있었기에..

아직 믿음이 깊지 않은 나 같은 초짜 신도에게 경외감이 스치운다.

IMG_3962.JPG (순교하는 과정을 형상화한 부조물)


이곳 해미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이유는 이곳에 서해안 방어를 위해 마련한 해미 읍성과 군영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군인들이 죄인들의 처형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충청남도 서북부 내포지방에서 잡힌 신자들 중 일부는 해미로 보내졌다.

이런 고난의 과정을 형상화한 부조물을 보며 현장감 이상을 느낀다.


IMG_3971.JPG (진툼벙)

팔을 묶여 끌려오던 신자들을 거꾸로 떨어뜨려서 죽게 만든 '진툼벙' 조형물에 슬픔이 사무쳐 온다.


IMG_3980.JPG (무명자들을 한 곳에 모신 묘)


국가의 정책 때문에 죄 없이 쓰러져간 영혼들을 향해 약소하나마 기도를 올린다.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한 번 알아 모신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다 하여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IMG_4003.JPG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고 프란시스코 교황 상)


IMG_4006.JPG (이름 없는 집)

모퉁이를 도니 이름 없는 집이라 명명된 집이 있는데 그 시대의 집이 아닌 성경을 필사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책상은 있으나 성경은 없었다.

뭐, 도난의 위험도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느덧 초가집을 지나니 한 바퀴를 돌게 되어 마침점에 다다랐다.

수박 같핣기 식이 된 것 같아 아쉬웠다.


서산에 27년을 살았지만 오지 못 하다가 3년 전 세종으로 이사한 후에야 오게 된 점 죄송한 맘이다.

경건한 발걸음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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