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작은 옷집이 있다. 큰 쇼핑몰도 아니고 상가에 하나 달랑 있는 그런 가게다. 선뜻 들어가기가 뭐해서 쇼윈도 밖에서 진열된 옷들만 보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러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가게 안으로 들어가봤다.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했다. 평소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스타일의 옷을 주인장이 권해주는 대로 입어봤다. 의외로 내게 어울리는 옷들이 많아서 반가웠다. 그 시간 다행히 다른 손님은 없었다. 주인장의 뛰어난 패션 감각과 친절함 덕분에 질 좋고 맘에 쏙 드는 옷을 여러 벌 사 들고 왔다. 그 가게에서 산 옷들은 지금도 자주 입는다. 단골이 되었다.
이라영의 《말을 부수는 말》을 읽으며 그 작은 옷집이 생각났다. 평소 관심 갖지 않던 책인데 읽다보니 취향저격이다. 내가 이런 책,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구나 싶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말이 잘 통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친구처럼 메타포라 은유 쌤이 권해준 이 책이 맘에 쏙 들어서 이라영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졌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근처 도서관에 들러 이라영의 다른 책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와 《정치적인 식탁》을 빌려왔다. 아직 서문만 읽었는데도 좋다. 친한 친구가 생긴 것처럼 설렌다.
이 책에 나오는 21개의 말은 살면서 흔히 듣고 쓰던 것들이다. 각종 매체를 통해 듣기도 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것을 소재로 떠들기도 했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은 말들도 많다. 예를 들면 색깔, 망언, 증언, 광주/여성/증언, 인권, 퀴어, 권력, 지방 등은 나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고 흘려버렸던 말들이다. 나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의 상처나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왔다. 내가 사는 세상인데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다는 자책이… 타인의 아픔을 자세히 보려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조차 지니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이 책에 나오는 말들>
고통 : 이름이 없어 더욱 고통스럽다
노동 : 노동이 ‘죗값’이 아님에도
시간 : 시간은 돈이 아니다
나이 듦 : 늙음이 낡음이 될 때
색깔 : 우리가 인간을 색깔로 말하지 않는다면
억울함 : 억울함은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가
망언 : 망언이 권력을 얻을 때
증언 : 망언에 맞서기
광주/여성/증언 : 역사도 경력도 되지 못한 목소리들
세대 : 세대를 호명하는 말은 과연 세대를 가리키는가
인권 : 인권은 취향 문제가 아니고, 차별은 의견이 아니다
퀴어 : 특정 장소, 몸만 허락하는 정치
혐오 : 문화적 입마개 씌우기
여성 : 최선을 다해 모욕하라
여성 노동자 : 여성 노동자의 언어를 복원하기
피해 : 누가 ‘피해호소인’인가
동물 : 인간적인 것은 옳은가
몸 : 비장애 신체성의 권력
지방 : 변방에서 살아가기
권력 : 권력의 무지, 무지의 권력
아름다움 : 공정은 아름다움과 연대한다
'몸의 고통은 철저히 사적이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아빠는 2년 반 동안 담도암으로 고생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고 약물 치료를 한 후 체중이 30kg 이상 빠져서 앙상해진 몸으로 눈을 감았다. 요양병원에 홀로 남은 엄마는 코로나로 외로움과 싸우다가 말을 줄이더니 기억을 잃어갔다. 결국 마지막 말도 남기지 못하고 아빠 곁으로 갔다. 그리고... 30년 넘게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했던 큰언니가 췌장암 수술을 받고 하루하루 마음 졸이며 항암 치료 중이다. 계속되는 가족의 고통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아빠, 엄마, 큰언니가 몸으로 느끼는 고통은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철저히 그들만의 것이므로.
노동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며 최선을 다해 안전한 노동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노동'을 공부 못한 사람의 징벌로 취급할 것인가.
'노오력'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비유를 소개한다. "우리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분노, 채워지지 않는 부러움, 광포한 포기, 이 모든 게 켜를 이루고 있는 양파."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윤정임 옮김, 문학동네, 2014, 81쪽) 공부와 노동의 위계에 의구심이 없다면 켜켜이 싸인 양파처럼 고통의 겹을 두른 이들의 언어를 이해할 리 없다. 고통의 언어를 듣지 못하는 귀는 죽음의 비명마저 듣지 못한다.
p.35~36
우리 두 아들은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아니다. 책에서 말하듯 공부가 '괜찮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토대를 말한다면 그렇다. 우리 아이들이 위에서 말하는 양파처럼 많은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학교 교실에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됐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괜찮은 대학은 아니지만 큰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게 되어서 만족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나름 최선을 다하며 재수 중이다. 두 아들은 내신이나 수능 성적을 1등급 받아본 적은 없지만 병역판정 신체검사 1등급의 건강한 청년으로 자랐다. 아들들이 '공부 좀 할걸'이라는 후회 없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고 있는 어떤 노동도 공부 못한 징벌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통을 외면한 채 우리는 아름다움을 맞이할 수 없다. 타자의 고통을 마주하고 사랑과 아름다움이 주는 힘과 그것의 정치성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이끌 것이다. 아름다움은 살아가는 모든 것에게 애쓰는 마음이며 동시에 죽어간 모든 것에게 애도를 잃지 않는 마음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된다.
p.350
이 책은 쉽지 않다.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책이 반갑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는 달라질 것이 분명하니까. 어제는 이라영의 《말을 부수는 말》로 메타포라 10기 5차시 수업을 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러 학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미처 가보지 못한 깊이까지 생각을 끌고 가기도 한다. 함께 걱정하고, 함께 분노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응원하며 우린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다. 다음 주까지 이 책에서 소재를 찾아 글 한 편을 완성해야 한다. 어려운 과제이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의 생각은 한뼘 더 자랄 것이고, 내가 아는 세상도 조금 넓어질 것이다. 은유 쌤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심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