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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Dec 01. 2023

엄마라서 더 좋은 논술쌤이 될 수 있다

술 마신 아들의 뒷치닥거리를 하며 드는 생각

어젯밤 재수생 둘째아들의 귀가가 늦었다. 9시까지 논술 수업을 하고 남편의 차로 함께 퇴근했는데 그때까지 아들이 집에 없다. 친구들과 저녁 먹고 들어온다고 했다는데 평소에는 밥만 먹고 들어오던 애가 좋아하는 <싱어게인>을 하는 시간까지 넘겨 들어오지 않으니 '이놈 오늘 한잔 하는가보다' 싶었다. 재수하느라, 수능 끝나고도 체육 실기 준비하느라, 몸 만들어야 해서, 스무 살 젊은 혈기에 술자리 한번 거하게 갖지 못하고 가끔 맥주 한 잔 홀짝거리는 정도가 다인 아이인지라 하루쯤 한잔 할 수도 있지 싶어서 카톡도 하지 않고 그냥 기다렸다. 11시가 다 되어서 현관문 키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방 앞에 아들이 우뚝 서서 풀어진 눈으로 날 보며 겸연쩍게 웃는다. "아들, 많이 마셨어?" 했더니 "응, 엄마 나 좀 많이 마신 것 같아. 미안."하며 살짝 비틀거린다. 


얼른 일어나 아들을 부축해 외투를 벗기고 방에 눕혔다. 속이 쓰린지 괴로운 표정으로 방에 대충 누워서 더 이상 움직이질 못한다. 이불을 제대로 펴고 누우면 좋으련만 자세를 바꾸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가 보다. 주방으로 나온 발도 추스리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로 인상을 쓴다. 우리 집에서 가장 작은 방에 우리 식구 중에 가장 큰 아이가 들어가 있는 꼴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 아들에게 이 방이 너무 작았구나 싶다. 평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아이라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금방 속이 얼마나 부대낄까 하는 생각에 안쓰러움이 내 맘에 번진다. 이럴 땐 술 좀 마실 줄 아는 엄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 속이 어떨지 예상이 되고, 다음 날 운동하러 가야하는 걱정 때문에 자책과 후회까지 들어서 마음이 불편하리라는 것도 다 안다. 술 좀 마셔본 엄마는 얼른 편의점으로 달려가 숙취 해소제와 박카스(아들이 좋아해서), 그리고 비타민 음료를 사왔다. 지금 당장은 먹기 힘들어도 아침에는 하나쯤 먹어두는 게 도움이 된다. 


좀 누워있으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이놈이 진짜 많이 마셨나 보다. 열어둔 방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리더니 손쓸 틈도 주지 않고 그냥 토해버린다. 키친 타올과 물티슈를 얼른 가져가 맨손으로 아들의 토사물을 치우고 옷을 벗기고 물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은 뒤 옷을 갈아 입히고 다시 눕혔다. 안해본 지 꽤 됐는데도 일사천리, 내 손이 무척이나 빠르다는 것에 나도 살짝 놀랐다. 안방에서 <싱어게인>을 보고 있는 남편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다. 우리 아들 술 마신 뒤치다꺼리 쯤이야 기꺼이 할 수 있는 엄마다. 평소 순하디순한 우리 둘째가 속상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말 못 할 고민거리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마신 건 아닌지 그런 게 맘에 걸리고 걱정될 뿐이다. 


수능 끝나자마자 주 5일 하루종인 운동하느라 살이 좀 많이 빠졌다 싶었는데 잠든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눈이 쑥 들어가고 볼이 패였다. 그래서인지 코는 더 오똑해졌고 입술은 메마르고 터 있다. 푸석푸석한 얼굴이지만 우리 아들 참 잘 생겼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술 마시고 온 아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참 우습고 애틋하다. 그제야 안방에서 나온 남편이 내 손을 꼭 잡고 누워있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나를 보며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그러다 울겠다" 한다. 진짜 울 뻔했다. 잠들었는 줄 알았는데 일어서려는 나를 붙들며 아들이 "엄마, 그냥 이대로 좀만 있어줘."하며 손을 잡았다. 그 말이 뭐라고 심쿵했다. 퇴근하고 씻지도 않았고 다음 날도 수업 준비하고 출근해야 하니까 되도록 일찍 편히 자둬야 하는데 아들 옆에서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힘들 때 엄마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손 내미는 아들을 어떤 엄마가 뿌리칠 수 있을까. 피곤하다는 생각은 싹 가시고 아들이 원한다면 언제까지든 옆에 있을 수 있지 하는 마음으로 "그래, 알았어. 엄마가 옆에 있을 테니까 마음 푹 놓고 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하며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고 등을 쓰다듬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렇게 아들의 좁은 방에서 방문을 닫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함께 잤다. 아침 일찍 부스럭대는 나 때문에 아들도 눈을 떴는데 다행히 몸 상태는 많이 나아진 듯했다. 그래도 아침 운동을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아들에게 물어보고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다. 체육 학원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컨디션 회복시켜서 내일 보내겠다고 문자를 드렸다. 마음 편해진 아들에게 엄마의 마지막 서비스는 뜨끈하게 끓인 콩나물국이다. 강화도에서 사온 새우젓을 한 숟가락 넣고 개운하게 끓여줬더니 밥 말아서 후루룩 먹고 "잘 먹었어, 엄마" 하며 하트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그래, 엄마 노릇 잘했다. 


젊었을 때는 못했을 일을 지금은 거뜬히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술 마시고 온 아들의 뒤치다꺼리도 그렇지만 논술 수업을 하면서 내가 참 많이 변했구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이들에게 몸을 기울이고 귀를 쫑긋 세운다. "선생님,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어냐면요." 하며 서로 먼저 말하겠다고 몸을 밀치면서까지 나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는 초등 4학년 아이들이 너무나 귀엽다. 40대 중반, 학원 운영을 그만두기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나를 상상하기 어려웠고 이런 아이들과 대화라는 걸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어 초등학교 선생님을 마음 속으로 존경했었다. 그런 내가 수업이 있는 날이면 쉴 틈 없이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든다. 우리 아들들이 그만한 나이였을 때는 일하느라 두 아들과 눈 마주치고 느긋하게 이야기 나눠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게 너무 아쉬워서 내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금의 학생들에게 갚고 있는 것 같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힘들었던 때도 많았지만 엄마라서 느낄 수 있고 엄마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다행이다 싶다. 엄마가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엄마가 아니었더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가면서 엄마인 나는 인간적으로 성숙해가고 좀더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린 아이들 앞에서 논술 수업을 하는 내가 엄마라서 더 좋은 선생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못해 준 것들을 나와 수업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표현한다. 지나고나면 들을 수 없는, 그때 나이에 쏟아내는 아이들의 말들을 아껴가며 주워 담는다. 아이들의 어떤 말도 흘려듣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태도로 진심을 다해 답하자고 마음먹는다. 아이들의 고민에 함께 머리 맞대고 고민하고 좋은 해결책을 주려고 애쓴다. 내 자식이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그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어서 익숙하고 마음 따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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