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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Dec 20. 2023

남편이 좀 편해졌으면 좋겠다

남편이 좀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

남편과 저녁 약속을 했는데 남편의 퇴근이 늦어졌다. 전화를 할까 했지만 가장 빨리 오고 싶은 사람이 남편일텐데 재촉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일을 마무리하는데 지장을 줄 것 같았다. 예상 시간보다 1시간이 훨씬 넘은 시간, 핸드폰이 울렸다. 

"배 고프지?" 

"아니야, 괜찮아. 오빠가 더 배고프겠지? 무슨 일 있었어?"

아무일도 없길 바랐다. 배고픈 것쯤은 괜찮으니까 별일 없다는 대답을 기다렸다. 

"회사에 좀 일이 있었는데... 가서 말해줄게. 되도록 빨리 갈 테니까 맛있는 거 먹자."


남편은 내게 회사일을 시시콜콜 말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일이 있다고 해서 호들갑을 떠는 성격도 아니다. 결혼 전 내 친구들이 붙여준 남편의 별명이 '마운틴'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산' 같은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다. 그런 남편의 목소리가 영 좋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무슨 일인지 궁금하고 걱정돼서 조급증이 났지만 남편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일 없는 사람처럼 반갑게 웃었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우리 뭐 먹을까?"하며 평소보다 과한 애교를 부리니 남편은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미소를 짓는다. 


동네 막회집에 가서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잔 하기로 했다. 우럭 매운탕이 맛있는, 우리 동네 맛집이다. 주문을 하고 남편이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리며 매추리알 다섯 개를 말끔하게 껍질 벗겨 남편 앞으로 밀어주었다. 남편은 회사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민원 업무를 담당할 때도 있다. 대부분 돈과 관련된 불만 전화를 받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별탈없이 본인의 성격만큼이나 무난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라 회사 사람들의 신뢰가 높은 편이다. 그런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금요일 퇴근 가까운 시간에 걸려 온 민원 전화는 이미 화가 난 사람의 것이었다. 여러 관공서에서 담당 업무가 아니라는 말만 들어서 답답하다고 했다. 남편 부서의 업무도 아니었지만 민원인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 도와주고 싶었단다. 그래서 본사와 관공서 여러 곳에 남편이 직접 연락을 하면서 알아봤지만 결국 민원인이 원하는 결과를 내 주지는 못했다. 불만스러운 결과에 대한 민원인의 화풀이는 남편에게 쏟아졌다. 해결해 주지도 못 할 거면서 왜 나서냐,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냐, 통화 내용 다 녹취했다, 본인의 업무도 아닌데 개인 정보까지 물어본 건 불법 아니냐, 여기저기 모두 고발하겠다 등등 남편이 애쓴 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은 자기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하다고 했다. 당황해서 말도 매끄럽게 하지 못했단다. 자신은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결과적으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못 됐고 회사도 곤란하게 됐다며 자책했다. 풀이 죽은 남편이 안쓰러웠다. 그 민원인도 주말이 지나고 나면 좀 진정이 될 거라고, 다른 관공서에서도 오빠가 애쓴 걸 알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진심은 다 통하게 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순리대로 흘러갈 거라며 서툴고 매끄럽지 않은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숱이 줄고 센 머리카락이 점점 많아지는 남편을 보며 가장으로서의 부담감이 남편을 이렇게 만들었나 하는 생각에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들었다. 큰소리 치는 민원인에게 쩔쩔 매며 고개를 조아리고 자신의 무능에 더 고개를 깊이 숙였던 그날의 남편이 내내 가슴을 친다.


이젠 멋있는 남편을 기대하지 않는다. 내 앞에서 세 보이려 애쓰고, 괜찮은 척 허세 부리는 걸 원치 않는다. 그저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편안하게 나이들어갈, 친구같은 남편이면 족하다. 남자라서 항상 강해야 하고 여자라고 해서 항상 기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뉴스만 보던 남편이 드라마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면 애써 못 본 척 해준다. 고장난 물건을 다룰 줄 모르는 남편 대신 내가 나사를 돌리고 못을 박아도 괜찮다. 남편이 좀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 내 곁에서 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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