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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Jan 04. 2024

박완서 읽기 9.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는 글을 읽으며 추억 여행!

오랜만에 비다운 비가 내려서일까? 우산을 쓰고 동네 서점에 들렀다 오는 저녁 무렵, 문득 따뜻한 소설 한 편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와 책장에 꽂혀 있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꺼내 들었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통해 시골에서의 추억을 소환해내는 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박완서(1931년 ~ 2011년)의 어린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1992년에 출간되어 청소년 필독 도서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일제 시대, 한국 전쟁을 겪은 작가의 어린 시절을 얼마나 공감할 지는 잘 모르겠다. 학원 국어 강사 시절, 이 소설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면 으레 싱아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 낯선 서울에서 먼 거리 학교를 혼자 걸어다녔던 작가에게 싱아는 향수였다. 15살 때 고향 충청도에서 낯선 인천으로 올라와 번호판 달린 버스를 단 한 번도 타지 못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중2 겨울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분 남짓 걸리는 학교를 걸어다녔다. 낯선 버스를 타는 것보다 그냥 걷는 것이 내겐 훨씬 편했다. 내 고향에선 1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버스를 타고 중학교에 다녔다. 물론 번호판 같은 건 없었다. 그 버스를 놓치면 친구들과 함께 산길로 들길로 걸어서 집에 가곤 했다. 그런데 도시에 오니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도 너무 많고, 다양한 번호판을 단 버스들이 수도없이 지나갔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에 가는 버스가 여러 대 있다고, 문간방을 우리 식구에게 내준 이모한테 들었지만 혼자 그 낯선 버스를 탈 자신이 없었다. 날 이상한 곳으로 데려다 놓을 것처럼 겁이 났다. 중3 내내 동네 친구 한 명 없었던 것도 한 몫 했다. 1년 넘게 혼자 걸어서 학교와 이모집을 왕래했다. 가장 외롭고 그래서 가장 생각이 많던 시절이었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p.77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나도 한번쯤 '순전히 기억에만 의존한 글쓰기'를 하고 싶어졌다.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이 닿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 놓는다. 할머니, 아빠, 엄마를 떠올리고 형제들의 어렸을 적 모습까지 생각해낸다. 금강 가까이 있었던 파란 지붕, 노란 문의 우리집과 친할머니의 초가집이 그려진다. 그런데 도무지 박완서처럼 묘사를 할 자신이 없다. 나의 기억력은 한없이 보잘 것 없다. 나의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이 되려면 상상력으로 기억의 한계를 그럴듯하게 메워야 할 듯하다. 



오랜만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읽으며 비 내리는 밤, 나의 어린 시절로 추억 여행을 다녀왔다. 지나고 나면 힘들고 아팠던 기억들까지 모두 추억이 되어 그리워진다. 미래의 또 어느 날엔 나도 박완서 작가처럼 주름진 얼굴로 지금의 나를 추억하지 않을까. 그때는 '순전히 기억에만 의존한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지금의 기록이 나중에 글을 쓰는 자산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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