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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Dec 28. 2023

박완서 읽기 8. 단편 전집 7『그리움을 위하여』①

박완선 단편 소설「그리움을 위하여」는 두 번째 읽는다. 좋았다는 기억은 있지만 좀처럼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박완서 단편 소설 전집 일곱 권 중 맨 마지막에 출간된 7권 『그리움을 위하여』로 다시 읽었다. 첫 부분을 읽다가 이게 소설 맞나 하며 의심했다. 박완서 작가가 2000년대, 그러니까 돌아가시 전 가장 최근에 쓴 단편 소설 중 하나인데 그냥 에세이나 산문이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박완서 작가의 실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움을 위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춥지 않은 남해의 섬, 노란 은행잎이 푸른 잔디 위로 지는 곳, 칠십에도 섹시한 어부가 방금 청정해역에서 낚아 올린 분홍빛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고 요리 잘하는 어여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풍경이 있는 섬, 그런 섬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인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 없이 살았음으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엔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가자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난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해. 그 대신 택배로 동생이 분홍빛 도미를 부쳐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그리움을 위하여』p.44~45


박완서 이야기 속에는 빈부의 격차는 있을 지언정 그것이 사람의 가치를 가르거나 행복의 경중을 달리하는 요소가 되진 못한다. 사람 생김새 만큼이나 사는 모습이 다 다르고 삶을 이끌어 가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그러니 누구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흉내내지 말고 자기 스타일의 행복을 찾으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힘들다고 신세 타령하고 싶다가도 소설 속 인물의 고단한 삶을 읽다보면 불평이 쑥 들어간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타인이 쉽게 단정지을 수 없고, 속단해서도 안된다. 나와 다른 색깔로 살아가는, 그 누구의 삶이라도 따뜻하게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순수한 사람,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그립다. 


「그 남자네 집」


나는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드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는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차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 같은 걸 감지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마치 길 가다 강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어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독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움을 위하여』p.68


오래 전에 학원 아이들에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를 가르치며 너무 좋지 않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을 강요했던 적이 있다. 몇 달 전에는 메타포라 학인들과의 글쓰기 모임에서 50대 남자 학인이 그 시집을 가져와 너무 애정하는 시라며 읊어주어서 오랜만에 눈을 감고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 시가 생각나는 소설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박완서 단편에도 「그 여자네 집」이 있다. 조만간 읽게 되겠지. 아무튼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첫사랑 남자의 집 또는 함께 갔던 특별한 장소 등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다른 이의 지난 사랑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진다.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읽었다. 


그는 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외우고 있는 시가 많았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을 오 리를 십 리, 이십 리로 늘여서 걸으면서, 또는 삼선교의 포장마찻집에 새파랗고도 어둑시근한 카바이드 불빛이 무대 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그리움을 위하여』p.73~74


예전에는 나도 시 몇 편 정도는 외우기도 해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단 한 편도 끝까지 외우는 시가 없다. 학창 시절 국어나 문학 교과서를 통해 읽었던 시들도 참 좋았는데 어느새 시와 멀어졌다. 요즘 나오는 시집을 몇 권 보지도 않았지만 점점 시가 어렵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박완서 산문을 읽다가 나도 시 좀 읽어야지 싶어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1, 2권을 주문해 책장에 꽂아 놓았는데 아직 펼쳐 보지도 않았다. 오늘은 그 시집을 꺼내어 나의 애송시 한 편이라도 만들어 외워봐야지 결심한다. 삭막한 현실에 나를 메마르지 않게 만드는 건 낭만, 그것이 시일 수도 있겠다 싶다. 


「마흔 아홉 살」


명치가 등에 붙을 듯이 날씬하다가도 생명만 잉태했다 하면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오르던 배는 이제 두꺼운 비계층으로 낙타등처럼 확실한 두 개의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허리의 후크를 풀자 역겨운 트림이 올라왔다. 자신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메마른 설움이 복받쳤다. 위선도 용기도 둘 다 자신이 없었다. 울고 싶은 갈망과는 동떨어진, 여자들의 찧고 까불고 비웃는 소리가 귓전에서 잉잉댔다. 

『그리움을 위하여』p.108


마흔 아홉 살을 넘겨 50대가 되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내 또래 다른 여자들의 삶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없거니와 다른 이들의 삶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부턴가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며 사는 삶에 신물이 났고, 죽을 때까지 그런 삶에 발들이고 싶지 않다. 누가 뭐라든 내 식으로 나답게 살아보자는 큰 뜻을 품어서라기 보다는 혹여 내가 뒤처지는 사람으로 느껴져 그동안 애써 적당한 높이를 유지해오던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인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 싫다. 다른 사람에 대해 찧고 까부는 일에 거드는 건 더더욱 싫다. 나도 가끔 살찐 내 몸이 비곗덩어리처럼 느껴져 서러울 때도 있지만 위선보다는 용기를 내어 중년 여자의 삶을 멋지게 살아내고 싶다.


「후남아, 밥 먹어라」


후남이는 알맞게 부숭부숭하고 따끈한 아랫목에 편안히 다리 뻗고 누었다. 그리고 평생 움켜쥐고 있던 세월을 스르르 놓았다. 밥 뜸 드는 냄새와 연기 냄새와 흙냄새가 어우러진 기막힌 냄새가 콧구멍뿐 아니라 온몸의 갈라진 틈새로 쾌적하게 스며들었다. 잠깐만, 어머니가 후남아 밥 먹어라, 다시 한번 불러줄 때까지 잠깐만 눈 붙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리라. 

『그리움을 위하여』p.139


작년 여름에 암 판정을 받고 수술에, 항암 치료에, 최근 방사선 치료까지 받으며 20kg 가까이 체중이 빠져 앙상해진 몸으로 병을 견뎌내고 있는 큰언니. 얼마 전 큰언니를 만나러 천안에 가서 쌈밥으로 점심을 먹고 겨울답지 않게 푸근한 날씨라 각원사를 산책했다. 그리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엄마의 음식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빠엄마가 살아 계실 때 큰언니는 30년 넘게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하느라 자주 왕래하지 못했다. 그런 언니가 아빠가 돌아가시고 5년 후인 작년에 엄마까지 떠나고 나니 평소 무뚝뚝한 성품답지 않게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며 자주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빠엄마가 그토록 애틋해하던 큰딸의 병을 모르고 가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맛보면 언니의 병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쉽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피붙이의 정,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지난 세월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마가 "주용아, 밥 먹어라"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거저나 마찬가지」


나는 비로소 '거저나 마찬가지'를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거저면 거저고 아니면 아니지 마찬가지란 무엇일까. 이 집을 정말 거저로 빌려준 거라면 나로부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전세금이 살아 있어 내가 전세를 든 거라면 당연히 전세 들어 있는 동안의 내 프라이버시는 보장돼야 한다. 

『그리움을 위하여』p.172


가족이나 마찬가지, 친구나 마찬가지, 이런 표현을 별 생각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말은 가족, 친구라는 말로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허울 좋은 말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면 가족이고, 친구면 친구인 거지 마찬가지라는 말이 뒤에 붙으니 그 말이 영 맑아보이지 않는다. 세상엔 거저로 얻어지는 게 없다. 처음부터 꿀리고 들어가면 나중엔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이젠 '우리 사이에 정으로 믿고 사는 거죠' 라는 말은 어리석게 들린다. 살면서 분에 넘치는 욕심 부리지 않고, 사람 관계에서는 적당한 거리로 서로의 취향과 공간을 인정해주며 가끔 만나 반가워하는 것이 잘 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촛불 밝힌 식탁」


아무리 부모 자식 간에도 감시하는 마음으로 지켜본다는 건 안 좋은 일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아들네의 불 꺼진 창이 딴집의 불 꺼진 창하고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칠흑이 아니라 모닥불의 잔광 같은 불확실한 밝음이 깊은 데서 일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퓨전 음식을 더욱 분위기 있게 만드는 아름다운 양초가 켜진 식탁이 떠올랐다. (…) 모닥불의 잔광 같은 희미한 빛을 보았다기보다는 느낀 어느 날 저녁, 나는 슬쩍 산책 나가는 척 혼자 나가 맞은편 아들네 아파트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연거푸 두 번 세 번까지 눌러보았다.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나는 느낌으로 안에서 웅성대는 인기척과 현관문에 달린 동그란 렌즈가 비정한 외눈으로 변하는 걸 알았다. 

『그리움을 위하여』p.187


나이 든 부모가 힘들게 낳고 키워준 아들과 그 아들의 짝인 며느리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두 아들만 둔 나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우리 두 아들이 결혼을 해 자기 가정을 꾸리고 난 뒤 지들 부모를 어떻게 대하고 취급할 것인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내가 어이없고 화가 났다. 설마 내 자식들이 그러겠어 싶다가도 나는 서로의 집 불빛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살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하긴, 나는 이 소설의 노부부처럼 재산도 넉넉지 않으니 아들 내외에게 서울 아파트를 해줄 형편도 못돼서 이런 일을 겪을 일도 없겠다. 이런 생각은 위안은커녕 힘만 빠졌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아니 남편과 나는 자식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늙어가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자식이 우리에게서 독립해 잘 살길 바라듯이 우리도 자식에게 기대거나 바라지 말고 쿨하게 독립해야겠다 마음먹는다. 




박완서 단편 소설 전집 7권 『그리움을 위하여』에는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6편을 읽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미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사람 사는 이야기를 육성으로는 듣지 못하고 이렇게 소설을 통해 보고 듣는다. 소설은 직접 경험이 아닌 간접 경험이라 마음껏 즐길 수 있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를 되돌아볼 수 있어 참 매력적이다. 나머지 6편도 기대가 된다. 이번엔 어떤 사람들의 어떤 사연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닫게 될까.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기분은 안온하고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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