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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Jan 15. 2024

소설을 읽는 마음

김금희 장편 소설 『경애의 마음』을 읽고

『경애의 마음』은 메타포라(은유 작가의 글쓰기 모임) 학인의 선물로 읽게 된 소설이다. 우리나라 여류 소설가의 책을 많이 읽었다는 그 학인은 이 소설을 통해 슬프고도 재미있는(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문장을 배웠다고 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그 학인은 눈물과 웃음이 함께 밴 글을 곧잘 썼다. 자기의 글 스타일을 가진 부러운 사람이었다. 나에게는『경애의 마음』이 무엇을 가르쳐 줄지 궁금했다. 기대하며 읽었다.


경애가 일영을 좋아하는 건 그렇게 빡빡한 생활에서 일영이 획득한 세상만사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먹고사는 일에 대한 지긋지긋함 같은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살겠다'라고 하는 일관된 당위가 있었기 때문에 그 태도는 무던함, 씩씩함과도 연관됐다. 경애는 언제나 어찌 되었건 살자고 말하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p.24


나도 친구를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적어보고 싶다. 그런데... 난 경애처럼 일영과 같은 친구가 없다. 무던하고 씩씩한 태도로 살아가는 친구 하나쯤 곁에 있으면 싶은데 살다보니 나에겐 이렇다할 친구 하나가 없다. 그래서 외롭냐고 물으면 딱히... 그럼 됐지 않냐고 하면... 그래도 아주 가끔은 함께 머플러를 두를 수 있는 가까운 친구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 나이 먹도록 편하게 수다 떨 친구 하나 없는 내가 좀 안쓰럽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쪄랴. "나에게 맞는 친구 구함"이라고 피켓을 들고 찾아나설 수도 없고.


둘이 함께 영화를 본 동인천의 영화관들은 애관, 오성, 인형, 미림으로 어딘가 낭만적인 이름들이었다. 멀티플렉스가 아니었던 그 극장들은 대개 좁고 영화표도 수기로 작성하며 좌석 번호도 없이 사람들이 아무 데나 앉아 있곤 했는데, 그래서 영화관이라기보다는 영화감상실 같은 느낌이었다.
p.65


책을 읽다가 반가웠다. 경애가 E와 함께간 동인천의 영화관들은 내가 모두 알고있는 이름들이다. 젊은날 한번씩은 다 가봤던 곳이다. 지금의 영화관과는 비교도 안되는 후진 시설에 쾌쾌한 냄새도 났었지만 누군가와 그런 영화관에 가 함께 앉아있으면 낭만이 느껴졌다. 미림에서는 남편과 연애할 때 처음으로, 야한 영화 <옥단춘>을 함께보며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있다. 애관 극장은 지금도 있다. 남편과 신포동에 데이트 나갔다가 연애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애관에서 <옥자>를 보기도 했다. 장소는 기억을 구체화시킨다.


엄마, 엄마는 뭐가 어려워?
오늘이 어려워.
오늘이 왜 어려워?
오늘을 넘겨야하니까 어려워.
오늘을 넘긴다는 것은 뭐야?
오늘을 견딘다는 것이지.
오늘을 견딘다는 것은 뭐야?
그건 오늘은 사라지지 않겠다는 거야.
오늘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뭐야?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 뭐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건 뭐야?
내일은 못 견딘다는 것이지.
내일을 못 견디면 어떻게 되는데?
내일을 넘길 수 없게 되지.
내일을 넘길 수 없으면 어떻게 해?
그러면…… 쉬워질 수도 있다는 거야.

p.167~168 상수가 죽은 엄마와 나눈 대화


하루하루 힘겹게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오늘은 견뎠지만 내일은 견디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 그렇게 위태로운 엄마를 바라보는 어린 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런 소설을 읽고 있으면 적어도 나는, 내 아들들은 이런 상황과 마음을 겪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소설보다 더 가혹한 현실을 겪어내며 꾸역꾸역 삶을 살아내고 있는,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평온한 오늘에 감사하고 좀더 괜찮은 내일을 기대하는 내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우리 형제들, 하룻밤 호텔에서 묵었다. 이 나이 먹도록 사 형제가 이렇게 함께한 건 처음이다.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먹을 수 없고, 혼자서는 외출도 힘들고, 매일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약을 복용해야 하는, 그런데도 담담한 목소리를 잃지 않는, 우리 큰언니를 보고 왔다. 함께 먹고 걷고 이야기하며 언니는 잠시 아픔을 잊은 듯했다. 잘 먹고 기분 좋게 쉬어서인지 컨디션도 아주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하루 빨리 언니가 평범한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게 아니라 함께 즐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p.307

누군가를 그렇게 불행하게 여길 자격은 없어.
p.314

고통을 공유하는 일은 이토록 조용하고 느리게 퍼져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밤이 깊어지듯이 그리고 동일하게 아침이 밝아오듯이.
p.319

힘을 쌓다보면 축적해온 모든 것들을 잃을 용기도 생겨나는 것일까.
p.324

구로. 아홉명의 오래도록 산 노인이 있는 마을, 그 이름은 공단이 있는 지금 이곳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시간이 쌓인 것, 굽은 것, 견디는 것, 부러지지 않는 것, 제자리에 앉아 있는 것, 색이 바랜 것, 유연한 것, 아주 슬프지는 않은 것은 오후의 퇴근길에 나선 이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p.344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p.349


소설을 읽는 마음


친구가 없는 나에게 소설을 읽는 시간은 현실에는 없는 각양각색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수다스럽다. 낄낄대며 웃다가 느닷없이 눈물을 떨구다가 정지 화면처럼 멍해지기도 한다. 나도 몰랐던 내 상처가 불거져 아파하기도 하고, 지금껏 잘 살아온 내가 대견해 스스로 토닥이기도 한다. 『경애의 마음』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p.352)'. 이런 소설을 읽고나면 나와 너에 대해 무심했던 내 마음을 살피게 된다.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에게 더 친절해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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