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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Feb 01. 2024

며느리와 딸, 아내, 엄마... 그래도 '나'

박완서 읽기 13. 장편 소설『살아 있는 날의 시작』

박완서의 장편 소설 『살아 있는 날의 시작』경제적 고도성장을 누렸던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 서울에 대한 작가 박완서의 창조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작품 해설 중에서). 1970년대가 경제적 고도성장의 시기였다는 것을 모른 채로 충청남도 시골에서 뛰어놀던, 예닐곱의 나는 몰랐던 세상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만족감은 전혀 없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그 시대에 주인공 청희와 같이 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주인공 청희는 경제적으로 아쉽지 않은 집에 대학교수 남편과 남매를 두고 신흥 주택가에서 미용실과 미용학원을 운영하는 40대 여자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만큼 교육 수준도 높고 돈 버는 수단도 좋다. 남편의 월급에 신경쓰지 않고 윤택한 삶을 살아가는 중산층 여성이다. 치매에 걸려 어린아이가 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부이기도 하다. 그녀는 집 밖에서나 집안에서나 거의 완벽한 여자로, 그녀의 삶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며느리 그리고 딸


효를 최고의 가치로 알던 시대다. 효는 여자가 갖추어야 최고의 부덕이며 집안에서 효를 실천하는 것도 여성이 도맡아야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딸로서, 결혼한 후에는 며느리로서. 효를 위해 몸과 마음을 쓰는 건 여자의 몫이라고 정해놓은 듯하다. 물론 엄마가 아들에게 기대는 것 또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결혼한 후에는 그 부담이 오롯이 며느리에게 옮겨 간다. 밖에서 일하는 며느리라도 예외는 없다. 주인공 청희는 20년 모신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후에도 군소리 없이 씻고 먹이고 재운다. 아들인 남편은 오히려 손님 같다. 멀찍히 떨어져 욕 먹지 않을 정도로 기본적인 도리를 티낸다. 그 상황이 너무 부당해서 화가 났다가 폐암에 걸린 친정어머니까지 순순히 모시기로 한 청희의 결정에 이건 이 여자의 팔자려니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라면 못 하겠다 싶다가 그래도 당하면 해야지 어떡하나 하다가 지금은 이렇게 사는 여자는 없겠지 안심하려다 나는 어땠나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이제 딸 역할도 할 수 없고, 며느리 노릇은 오래 전에 졸업했다. 시어머님, 시아버님, 친정아빠, 친정엄마 순으로 모두 떠났다. 시어머님이 너무 일찍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는 그저 황망했고, 남편과 떨어져 있던 때라 시아버님 가시는 길은 내가 지키지 못했다. 친정아빠는 2년 반을 암과 싸우면서 우리에게 마음의 준비 할 시간을 주었고, 친정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임종을 지킬 시간도 주지 않고 홀로 눈을 감았다. 네 분의 떠나는 모습은 다 달랐지만 하나같이 슬픔이었고 지나고나니 그리움이다. 자식으로서 못해드린 것만 기억에 남아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소설의 주인공 청희처럼 돈으로도 잘해드리지 못했고, 시간과 몸을 써 봉양해 드리지도 못했다. 부족한 맏며느리를 귀하게 대해주신 시부모님과 부모 마음을 깊이 헤아리기엔 철이 없었던 막내딸을 예쁘다, 잘한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친정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덕분에 나는 며느리로 살면서 힘겹지 않았고 딸로 사는 동안 행복했다. 


아내


여자가 집안일 외에 일을 가지면 집안일은 엉망이 되어야 옳았다. 그건 곧 여자는 집안일 외에 따로 일을 가질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되니까. 아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공치사 한마디 안 하다니, 아내가 그런 독자적인 유능함으로 그를 모욕하고 있음이 아니랴. 고로 아내의 유능함은 일일이 비행에 해당됐다. 그는 아내의 비행을 결단코 용서해선 안 된다고 별렀다.
p.193


언젠가는 정직해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이 원하는 것을 눈치 보느라 꼭꼭 감추고 있던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뭔가에 대해, 나는 여태까지 행복하게 산 것일까. 행복하게 산체한 것일까에 대해, 남편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에 대해.
그 여자는 두려움 없이 정직해질 자신이 없었다.
p.255


70년대 후반 내가 청희의 남편 인철과 같은 사람과 부부로 살았다면... 장담하건대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 같다. 연애 시절 사람 됨됨이를 제대로 판단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그때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덜 되었을 때이고 서로 사랑에 눈이 멀었을 터이다. 그러니 결혼한 후에 상대방의 진짜 본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우리나라 이혼율이 높은 이유도 예전에는 참고 살았던 사람들이 노후에라도 헤어지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이 한 몫 한단다. 물론 노후에 이혼을 하겠다고 나서는 쪽은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훨씬 많다. 남자는 밖에서 돈 벌어오는 사람, 여자는 안에서 집안 단속하는 사람, 이런 구분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남자와 여자의 역할 분담이나 도리 등을 강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꼰대 소리를 들으면서도 '라떼는 말이야'라며 구습을 미풍양속인 양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나기도 한다. 


다행이다. 내 남편은 적어도 남자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대놓고 고집부리지 않는다. 일하는 여자로서의 내 능력을 인정해주고 직업인으로서 나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예전에 학원을 운영할 때, 비혼주의자였던 논술 강사가 남편과 나를 보며 자신이 봐왔던 부부 중에 우리가 가장 이상적인 관계로 보인다며 부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집안일에 있어서는 서툰 남편보다 손빠르고 익숙한 내가 훨씬 많은 역할을 해내지만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남편이 나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며 내 눈치를 보는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다. 우리 부부가 완벽한 관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의지하게 되는 든든한 사람이 나에게는 남편이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 전에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부부 생활의 기본이자 필수 요소가 아닌가 싶다. 


엄마


"명구야, 혹시 엄마가 딴 엄마들보다 자식 걱정을 덜한다고 생각하고 섭섭해한 적은 없니? 그랬다면 그건 오해다, 너. 엄만 널 사랑해. 딴 엄마들이 고3 아들한테 해주는 대로 엄마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됐던 건 관심이 덜해서도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너를 믿었기 때문이야."
p.435


이런 생각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엄마들의 공통된 것인가보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내 자식에게 덜해준 것 같은 느낌, 혹시나 자라면서 엄마에게 서운한 적은 없었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형편이 다르니 물질적 지원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내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면 내가 엄마 노릇을 잘 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자책을 하게 된다. 재수생 둘째의 입시 결과 발표가 며칠 내로 다가왔다. 이번이 네 번째다. 나는 두 아들에게 '너를 믿는다'는 말도 부담스러울까봐 입 밖에 내놓는 걸 아꼈다. 이번엔 아들의 섭섭한 마음을 걱정하지 않고 나 자신을 자책하며 잠시라도 우울해지지 않게 결과가 좋으면 바라지만... 그것도 내맘대로 안 되니... 며칠 째 산책길에 부처님 앞에서 두 손 모아 빌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나'


"남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체하기 위해 애쓰느라 나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았다. 이제부턴 안 그럴거야. 행복하게 헛사는 것보다는 불행하게라도 참으로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말해서 엄마는 팔자를 고쳐보고 싶은 거야."
p.466


나 자신을 돌보는 것, 세상 엄마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포장하며, 척하며 사는 것은 결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다. 나도 20년 넘게 일하면서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 자신을 오롯이 보게 된 건 일을 그만두고 돈과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그때 결심했다. 더 이상 내가 아닌 나로 살지 않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자유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내, 엄마이지만 그래도 '나'가 제일 중요하다. 주인공 청희의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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