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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 주용씨 Jan 25. 2024

박완서 작가와 좀 가까워졌다

박완서 읽기 12. 산문집 8『한 길 사람 속』②

박완서 읽기를 시작하면서 한 세상 사는 건 똑같아도 삶에 대한 깊이가 다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돌아가신 후에도 그 이름이 잊히지 않고 대단한 팬층을 이루고 있으니 대작가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 작가의 글을 읽는다고 해서 과연 그분의 글솜씨를 내가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의심했다. 인간적으로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도, 나와는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산문 『한 길 사람 속』을 읽으며 박완서 작가와의 거리가 좀 좁혀진 것 같다. 아, 이분도 이런 생각, 이런 고민, 이런 부끄러움, 이런 방황이 있었구나 하며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좀 편안해졌다. 


3부 하늘에서와 같이

내가 꿈꾸는 선물
전망 좋은 집
나의 어머니
여자만 출가외인인가
남자도 해방돼야 하는 까닭
내 식으로 먹기
서태지와 아이들
잘 가라, 5월의 풍경들이여
환청으로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고궁에서
아아, 가을인가봐
하늘에서와 같이


4부 시인의 묘지

시인의 묘지
치악산과 면장갑
소설 나부랭이, 책 나부랭이
책 읽는 소년
재미로 또는 오기로 읽은 책들
신경숙씨 보셔요
내가 잃은 동산
남도 기행
면죄부
쓰고도 슬픈 커피맛





근래에는 젊은이들이 더 타산적이고 물욕적이고 남들이 한다면 맹목적으로 덩달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많이 줘도 아깝지 않은 게 자식이라지만 넘치게 가진 가가 결코 높은 이상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감안할 때, 모자라게 주는 게 가장 값진 것을 주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련만.
p.263「고궁에서」
대학생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감과 정직성이 결여된 채 대학생이 된 걸 이상해하지 않고 오직 대학생이 된 것만 대견해하는 풍토를 개탄하는 그가 외롭고 안쓰러워 보였다. 문제는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에 있는 게 아닐까. 들어가기만 하면 과정의 온갖 부실함은 눈감아줘 버릇해온 연장선상에 우리 사회의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p.294「책 읽는 소년」


큰아들을 재수까지 했지만 이렇다 할 대학을 들어가지 못하고, 본인이 원하는 전공으로 바꿔 학점 인정 교육기관에 다닌다. 작은아들은 올해 재수생으로 정시 입시를 치르는 중이다. 오늘 정시의 마지막 다군 실기 시험을 보러 간다. 두 아들 모두 재수까지 하며 호되게 우리나라 입시를 치른 엄마로서 대학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이렇게까지 해서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우리나라 대학인가 하는 생각부터 그렇게 고생하고 들어간 대학에서 아이들은 과연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까지, 둘째의 합격 소식을 간절히 바라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씁쓸하다. 아들에게 '너의 꿈을 응원해'라고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이젠 어떡하지' 하며 아이도 나도 허둥거릴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라며 서툰 위로를 하고 나 스스로도 아들을 위해 마음을 다잡겠지만 사실 대학이 아니라면 무엇을 권해야 할 지 딱히 뾰족한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우리 아들들에게 최소한의 책임감과 정직성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한다. 대학 졸업장보다 더 가치있는, 삶과 사람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엄마가 되기로 다짐한다. 


이 나라의 자연처럼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운 자연은 지구상에 어디에도 없다. 신이 온갖 좋은 것을 다 모아다가 공들여 꾸민 정원 같다. 하나도 넘치게 준 게 없이 다만 조화롭게 주었을 뿐이다. 거기 몸담고 사는 사이에 인성 또한 근면 절약하지 않고는 먹고 살기 힘들게, 협동하고 배움에 힘쓰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도록 형성됐다. 이런 고상한 인품이야말로 어떤 풍요보다 은혜로운 자연의 혜택이다. 가장 후졌다는 시골이 보석처럼 빛나 보였던 것도 인간과 자연의 그러한 그지없이 아름다운 조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호화 호텔도 외부에 얽히고설킨 불 꺼진 네온의 잔해 때문에 폐허처럼 보였다. 도시 둘레는 풀 한 포기 안 나는 사막이고 라스베이거스는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추악한 폐허에 불과했다. 어리둥절한 황당함이 가시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우리가 조금 잘살게 됐다고 자본주의의 악의 꽃들만 들입다 수입해다 정신없이 즐기다가 어느 날 문득 불빛이 사위어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사막화된 황무지 한가운데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p.358~359「남도 기행」


송도 신도시에는 센트럴 파크라는 유명한 공원이 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동반한 젊은 부부들과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인천에 살지 않아도 이 공원 이름은 들어본 사람들이 많고 이곳을 배경으로 해서 찍은 영상을 가끔 TV에서도 보게 되니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간인 건 분명한 것 같다. 그 공원 주변으로는 송도 신도시의 내로라하는 호텔과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이 즐비해 있다. 얼마 전 나도 우리 형제들과 다른 객실보다 좀 더 비싼, 오크우드 센트럴파크 뷰에서 하룻밤 투숙했다. 물론 우리 형제의 첫 여행이기도 하고 멀리 갈 수 없는 큰언니를 배려한 선택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토록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원이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나는 그 공원에 거의 가지 않는다. 처음 갔을 때는 우리나라 같지 않은 공원 풍경에 놀랐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이상하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잘 조성된 센트럴 파크보다는 산책로만 놓여있는 동네 청량산이 훨씬 편하다. 매일 가도 질리지 않는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그럴 듯하게 꾸며놓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인 것 같다. 


연말 학원 송년회를 센트럴파크 맞은 편 쉐라톤 호텔 뷔페에서 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까지 좀 여유롭게 걸어 갔다. 저녁 8시가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번쩍거리며 높이 솟아있는 건물들에 압도되고 말았다. 누군가는 송도 신도시의 야경이 멋지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순간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나를 둘러싼 빌딩숲들이 내 갈 길을 막아선 것처럼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이런 곳에서는 못 살겠구나, 아니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같이 시골에서 나고 자란 우리 형제들 중에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도시의 편리함이 좋다고도 하고, 시골에 가면 뭐하며 먹고 사냐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5년 후 시골은 아니더라도 남편과 도시를 떠나 한적한 지방에서의 생활을 꿈꾼다. 우리나라의 소박하고 아담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에서 자본주의와 좀 멀찌감치 떨어져 살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한 편의 글을 쓰려면 이걸 붙였다 저걸 떼었다 하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최상품은 아니어도 하품은 만들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글쓰는 과정이 물건 하나를 만들어내는 노동처럼 고될 때가 있다. 좁은 식견과 서툰 글솜씨 탓이라고 여기며 어떻게든 오늘 하루 한 편의 글을 써내자 애를 쓴다. 그러다가 성에 안 차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부끄러운 글을 내놓을 때가 많다. 그런데 박완서 산문을 읽고 있노라면 어디 하나 깁고 짜맞춘 데 없이 글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작가란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글쓰기의 소재를 찾아내어 자기만의 개성을 입히는 데 재주가 출중한 사람이구나 싶다. 그 재주가 부럽고, 나는 참 갈 길이 멀구나 싶어 또 위축되려고 한다.


박완서 산문을 읽으며 그가 거론하는 소재에 대해 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얹어보는 연습을 한다. 아, 작가님은 그런 곳에서 그런 풍경을 보시며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답니다. 이러면서 나도 박완서 작가처럼 나만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써보려고 노력한다. 아직 흉내 수준도 못내고 있지만, 한 가지 위안을 삼고 싶은 건 <박완서 읽기>를 하면서 글쓰기가 좀 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으니 '오늘은 뭐에 대해 쓸까'를 덜 고민하게 된다. 『한 길 사람 속』을 다 읽었으니 이제 박완서의 소설을 고르러 도서관에 가야겠다. 박완서 작가의 책이 내 글쓰기 선생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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