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엄마도 혼자만의 시간, 공간이 필요하다
어제 큰언니를 만나러 천안에 다녀왔다. 차가 막히지만 않으면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2주 전에는 출퇴근 시간을 피한다고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왕복 5시간 이상 운전을 해서 다녀왔다. 피곤하다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되게 무척 힘들었고, 무엇보다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어찌나 아쉬운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안 막히는 시간을 노려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 6시 전에 출발했다. 7시 20분 천안 IC근처 스타벅스에서 3시간 40분을 나의 것으로 썼다. 그리고 언니들과 시간을 보내고 다시 스타벅스에서 6시부터 8시까지 2시간 남짓 또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8시가 넘어서 어두워졌을 때 천안에서 출발, 뻥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9시 30분에 집에 도착했다. 왕복 3시간 걸렸다. 도로에 시간을 버리지 않았고, 집에 있었다면 가족을 위해 썼을 5시간을 날 위해서만 썼다. 꽉 찬 하루를 보낸 느낌으로 행복했다.
우리 집 거실 책상보다 훨씬 작은 카페 테이블 앞에서 5시간 넘게 앉아서 나는 정말 많은 일을 했다. 글을 써서 브런치 매일 연재를 완료했고, 논술 수업 3월 프로그램을 포토샵으로 완성해 이번 주 수업과 함께 학부모님들께 공지했다. 작은아들의 운전 면허 학원 일정을 조정했고, 『아침의 피아노』를 읽으며 몇 개의 문장을 수집해서 다이어리에 짧은 일기를 썼다. 『식탁 위의 세계사』를 읽으며 논술 수업 준비를 했고, 틈틈이 사색에 잠기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나만의 우주에 있는 듯한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우리 집은 우리 가족에게 분명 평온과 안식을 주지만 가끔은 날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무지의 공간이 오직 내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오랜만에 느낀 짜릿함이었다.
다시 오늘, 눈을 뜨자마자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어제의 피로를 풀며 여유로운 수요일을 보내볼까 했는데 그 계획은 와장창 깨져버렸다.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자마자 카톡이 왔다. 작은아들 친구의 엄마다. 두 아이 모두 재수까지 했는데 입시 결과가 안 좋은 터라 말은 안 해도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는 처지다. 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진 엄마이고 우리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도 진심으로 느껴져서 반갑게 연락했다. 아이들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이야기하다가 집 가까운 대학의 평생교육원 진학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았다. 오늘 2시 군대 지원 접수를 하려고 했었는데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어쩌면 아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잡을 수 있는 건 다 잡자는 마음으로 아들을 깨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평생교육원 상담을 신청했다. 상담은 받았으나 아들과 나는 '우선 군대'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2시 전에 잠깐 시장에 들러 점심 요기를 하고 간단하게 시장을 봐서 집에 들어왔다. 2시에 병무청 사이트에서 군 입영 신청을 해야 하는데 정보 입력이 늦어졌고 엉뚱한 공지를 보는 바람에 시간을 초과해 추가 모집 접수를 놓쳤다. 결국 오늘 3시까지 별 소득없이 내 시간은 흩어지고 거실 내 책상 앞에는 한숨만 쌓였다. 집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항상 예기치 않은 것들로 잘도 채워진다.
언제부터인가 돈보다 시간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지갑의 돈을 세는 것보다 오늘 하루 몇 시간이 남았는지 계산할 때 입이 더 바짝 마른다. 하루 24시간을 내맘대로 온전히 쓸 수 있다면 정말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무자식 상팔자라며 자식 없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가끔 부모 자식이라는 끈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굴레 같아서 벗어던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가족 생각 안 하고 내 한 몸만 생각할 수 있다면 좁은 고시원에서도 내 꿈을 활짝 펼칠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이건 오늘처럼 맘 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내일이면 출근을 해야 하는데 하루 남은 휴일이 저물어 가는 지금, 오후 늦은 시간이라 드는 감정이다. 저녁에 내가 차린 밥상에서 식구들과 오순도순 이야기꽃 피우다보면 역시 우리 집의 꽃은 나라며 자존감은 높아질 테고, 내일이면 돈 버는 엄마로 가슴 활짝 펴고 출근할 것이다. 이렇게 25년 나는 아내로 살았고, 엄마로 살고 있다. 나의 시간과 공간을 가족과 살뜰히 나눠 쓰면서 말이다.
어제, 오늘 나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일정한 시간, 가족들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거실 커튼을 바꾸고 조명을 그럴싸하게 해놓아도 가족 공유 공간에서 나의 시간은 수시로 방해받는다. 식구들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면 내 촉수는 그들에게로 뻗친다. 냉장고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면 내 엉덩이는 자동으로 들린다. 남편이 켜놓은 TV 소리는 문틈을 뚫고 내 귀에 정확히 꽂힌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나의 불만이 쌓이면 가족들에게 어떤 식으로는 쏟아놓게 될 테니 나와 가족의 정신적 안정과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의 시간과 공간을 사수해야겠다. 우선 새벽 기상을 다시 시작해 내 시간을 확보한다. 그리고 오전 시간 도서관으로 피신해 집안일에서 멀어진다. 가끔은 쿨하게 "오늘 나 늦어. 밥은 알아서 먹어."라고 단호하게 카톡을 보낸다. 마음껏 내 시간과 공간을 누린 나는 행복해져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음...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