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도 저희에게 기대세요
어른이고 싶었던 나도 어른이 필요했다
나의 첫 제자이기도 하고 정말 온 마음 가득 함께 공유했던 제자가 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차갑고 두터웠던 벽을 가진 이 학생에게 더 따뜻한 벽을 알려주고 싶었고, 벽을 잠깐이라도 허물어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학생이 있었다. 교사가 학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교사가 학생과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나의 첫 제자이기도 하다. 교사로서의 첫 경험들을 소중하게 만들어준 학생이고, 나의 어설픈 첫 해를 소중히 기억해주는 학생이고, 나의 교직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생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 처음으로 놀러 왔던 학생이고, 우리 가족을 처음으로 소개받은 학생이었고, 자신의 친구 세계에 경계 없이 초대해준 첫 학생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내가 친구보다도 의지하고 있는 제자이기도 하다.
휴직을 하고 자존감도 그렇지만, 교사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랑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잠에 들려던 차, 괜히 더 울컥했던 밤이었다. 술주정일 수 있지만 제자에게 연락을 했다. 이래저래 소소하게 편안한 대화를 시작으로 나의 요즘 우울증세 원인이 되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휴직 후 학생들의 근황에 대한 소식을 점점 들을 수 없게 되었고, 교사로서 나의 영향력과 역할의 부재가 느껴지면서 자존감이 내려간 것이었다.
제자들이랑 교류를 하지 않아도 난 외롭지 않아! 하고 자신 있게 외치고 싶었고, 나의 우울을 모른 척하고 싶어서 가볍게 넘기려는 방어기제로 "약간 내가 애정결핍도 있나 봐. 학생한테서 채우려 하지 말아야겠어." 하고 고민을 툴툴 털어버리는 척했다. 이에 온 답장으로 "선생님도 저희 든든하게 생각하고 좀 기대세요. 제자로 말고 뭐 친구로 보자 해도 되고." 생각하지 못한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니 교사니까 애들한테 기대지 않겠다고 했더니, 친구라 생각하고 기대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성적 판단보다 앞서 감정이 판단을 대신해주었다. '이 말, 네가 듣고 싶던 말이지?'라고. 솔직히 학생들에게 본받고 싶은 멋진 어른,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어른, 친구 같은 어른이 되어주고 싶었던 나였지만 반대로 제자들에게 기대는 나의 어리숙함을 느낄 때면 어른스럽지 못하다며 거리를 뒀었다. 게다가 내가 함께 해온 마지막 학생들의 졸업과 함께 휴직을 했더니, 20대를 지내고 있는 그들의 시간에 점점 내가 없어져 가는 것을 느꼈고, 나를 더 이상 어른으로 찾아 주지 않는구나 하며 외로움을 느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을 제외하고 본받고 싶은 어른이 많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존경하는 어른은 신사임당과 세종대왕, 그리고 스티브 잡스였다. 그래서 어려움은 스스로 풀어나갔고, 외롭게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나에게도 어른이 있었다면, 내가 조금 더 건강하게 더 큰 무대에서 더 좋은 영향력을 발휘했을 텐데 하고 생각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동료 선생님에게 어른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울면서 말하던 내 모습에서 그 절실함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었다.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했더니 놀라운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학생들이 일단 20대 초반이고, 생각보다 사회에 던져지고 나서 정신이 없어서 본인이 정말 중요하고 뭔지 찾는 시간이다 보니 다른 사람이 잘 안 보이고 안 느껴질 거예요. 그리고 그 순간들이 제일 재미있고, 제일 힘들고, 제일 중요하기도 하고.."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의 20대엔 나가 온전히 주인이었고, 나 스스로 그 세상을 펼쳐나가기 바빴다. 그리고 지금도 나의 20대를 돌아보면 너무 찬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위대했다고 생각한다. 내 제자들이 그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겁이나기도 했다. 그 순간을 활기차게 지나고 나면 공감대가 떨어진 늙어버린 제 스승에게 안부의 인사조차도 건네는 것을 어려워할 거라는 생각에, 내가 그런 존재가 돼버릴까 겁이 났었다. "정말 냉정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느낌을 받는 것은 그 제자의 몫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선생님대로 하셔요~. 다 끌어안을 수 없으니까. 이런 순간이 오면 느끼는 건데, 나를 좀 더 봐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더 알아보는 시기라고 하나?"라는 답변을 받았다. 7살 어린 제자에게 인생 조언을 듣고, 그 순간은 계급장을 뗀 어린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술주정이니 할 수 있는 고백으로 "내가 젤 좋아하는 애니까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지, 선생이 이런 거 말하기가 쉽니. 그래도 너네도 다 성인인데, 나도 친구가 필요하잖아."라고 찡찡댔다. 그냥 하소연을 했는데 "먼저 그래 주시니 그래서 또 존경하죠."라고 해주었다. 내가 기대는 것에서 존경을 표한다는 게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머리는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마음은 알아들었는지 눈물만 계속 흘렸다. 어른이 없어봐서 어른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어른이 없어봐서 진정한 어른이 어떤 것인지 몰랐던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찡찡대 보았다. "왜 나 휴직했는데, 아무도 축하 안 해주냐. 난 정말 어렵게 결정한 거고, 졸업생들도 그렇게 나보고 학교를 떠나라는 말로 졸업 인사를 해놓고, 나 휴직했는데 왜 칭찬도 안 해주고 축하도 안 해줘?"라고 생떼를 부렸다. 그랬더니 이 어린 스승을 토닥여줬다. "거하게 함 휴직 파티 치러야죠! 고생하셨는데, 이게 잘 몰라주고, 야속하고 서운하고 그런 건데.. 일단 알려야죠! 봐라!! 나 쉰다!!!"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 불특정 다수에게 휴직 소식을 알리기 싫었지만, 내심 내가 아끼는 사람들은 알아주길 바랐나 보다. 그렇게 정말 나의 휴직 파티를 진행해줬고, 하필 스승의 날과 나의 생일도 있어 스승의 날 기념 및 생일 파티를 함께 해주었다. 자주 연락을 못 나눠 미안했지만 애틋했던 제자들도 같이 파티를 열어주었고, 자신의 집에 어머니도 계신데 어버이날 행사보다 더 크게 손수 파티장을 열어준 제자와 자신의 퇴사 및 여러 일도 있지만 함께 파티를 마련해주고 고심하여 케이크도 선물도 골라온 제자가 함께 같이 해줬다. 스승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큰 현수막도 선물 받았고, 고이 접어 잘 챙겨 와서 방에 붙여놓았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 SNS에 게시글을 도배했고, 구설수에 올릴 사람들 신경을 쓰기보다 '나 이 정도로 멋진 교사야.'하고 값진 허세를 가득 부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