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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Jul 26. 2023

[책리뷰] 그러라 그래, 양희은

마무리를 준비하는 가을빛 노년 이야기



가수 양희은 씨의 ‘그러라 그래’.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표지 그림도 ‘에휴 시끄러운 것들.. 그러라 그래~’ 하고 쿨하게 넘기는 모습이 연상되어서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졌다.


사실 책으로 읽은 건 아니고 오디오북을 구매해서 출퇴근 길에 운전하면서 들었다. 운전대만 잡으면 평소에 안 하던 험한 말을 내뱉는 나에게 차분한 안전 운행을 선물해 준 고마운 오디오북이다. 양희은 씨가 직접 읽은 챕터도 있고 전문 성우와 후배 연예인들이 낭송한 챕터도 있다.


나는 양희은 씨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유명한 ‘아침 이슬’은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이유와 함께 콜라보한 ‘한낮의 꿈’도 즐겨 들었다. 나에게 양희은 씨는 예능에서 희극인들과 맛있는 것을 즐겨 드시는 털털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책은 그러한 호탕한 분위기의 시원시원하기만 한 내용은 아니다. 70세 즈음이신 저자와 남편분은 90대이신 노모를 모시고 계시며, 기르는 반려동물도 사람의 수명으로 따지면 80대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책은 석양 같은 노년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 병원과 친해지는 나이, 예전보다 느려진 신체 속도, 어머니의 치매 … 또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녹록지 않았던 삶의 우여곡절을 담담한 어조로 읊어주신다. 양희은 씨의 목소리로 오디오북을 듣다 보면 마치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언제쯤 솔직한 일기를 쓸 수 있을까


책 중 '죽기 전에 필요한 용기' 챕터에 어머니의 일기에 관한 부분이 있다. 저자의 어머니께서 치매가 시작되어 집에서 요양을 하셔야 했는데, 푹 쉬라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일거리로 바느질을 계속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시고 싶은 말씀도 남길 겸, 일기 쓰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치매 초기가 진행 중이라 시점이나 이야기도 오락가락하셔서 곧 일기 쓰기를 포기하셨지만, 그래도 '죽기 직전이 되어야 내가 이 이야기들을 허지' 하셨다고 한다. 저자는 그에 '그런 이기적인 생각이 어딨어? 이제야 풀지도 못한 맺힌 마음 던져놓고 가버리면 우리는 어쩌라는 거야?'라며 톡 쏘아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감사하다는 솔직한 말을 미리 진작 하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나도 죽기 전에는 솔직해질 수 있을까. 나는 사실 혼자 읽는 종이 일기장에도 인물의 본명을 쓰지 못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일기를 데스노트에 쓰는 것도 아닌데, 왠지 본명을 쓰면 그 사람이 언젠가 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임의로 별명을 붙여서 쓰곤 한다. 하지만 나중에 읽어볼 때 나조차도 그게 누구 별명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누구 얘기를 쓴 건지 알 수 없는 부작용이 있었다.


혹시 생을 마무리할 시점을 알 수 있다면, 그때에는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지.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이별은 갑자기 찾아온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사람들과 갑자기 볼 일이 없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때 후회는 얽힌 마음을 풀지 못한 남은 사람의 몫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 순간 솔직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안나 2022, 쿠팡플레이


지금이 미래에서 온 순간이라면


저자는 30 대에 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책에서 소개하듯 10대 후반부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일을 한 터라, 그 판정은 더욱더 참담했을 것 같다. 이후 다행히 잘 극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셨지만 말이다.


저자가 암 선고받은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좀 더 어린 나이인데, 나도 혹시 지금 암 진단을 받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목표도 많이 남았다.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것들의 결실을 보려면 몇 년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전에 떠난다면 억울한 마음이 클 것 같다. 시한부 판정 당시 30세였다던 저자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예전에 김혜자 씨와 한지민 씨가 열연했던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이야기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젊은 날로 돌아갔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후 나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알고 보니 내가 지금 인생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시간 여행이 되어 지금의 나이로 온 것이다. 그러면 내 인생이 어떻게 보일까. 드라마에서는 돌아보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던데. 다 지나가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라 그래' 하면서 살 수 있을런지.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그러라 그래


강하고 씩씩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저자가 풀어놓은 젊은 날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시작한 일, 주점 같은 곳에서 노래하는 일하다 서러웠던 사연, 젊은 나이의 암 판정... 또 히트한 앨범이 금지곡이 되기도 하고 믿었던 음반사 사장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아마 70 세 즈음이 되신 지금 '그러라 그래' 할 수 있는 여유도 세월의 풍파 속에서 갈고 닦여진 내공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직 미성숙한 나는 '그러라 그래'가 잘 안 된다. '그러라 그래' 하다 보면 어느새 호구가 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아직은 지킬 것도 많고 치고 나갈 것도 많아서 가드 올리고 으쌰으쌰 살아가고 있는 편이다.

언제쯤 초연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심하게 느껴지는 제목과 달리, 한번쯤 삶과 노년기에 대해 생각해 볼 무거운 울림을 주는 책이었다.  


마음의 평정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오늘도 퇴근길에 오디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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