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게 온
뒤뜰 한 귀퉁이 어느 상록수
보여도 보이지 않는
이름 모를 큰 나무
켜켜이 쌓여가는 카키색 옛 잎들
나무껍질 튼 살은 살아온 세월 그대로
나이롱 꽃 수술 둥글게 앵도라져
줄줄이 사탕 다발로
여문 멍게빛으로 물 오르더니
오늘 문득 노을이 되어
노을은 단풍 같은 꽃이었음을
새봄 볕에 타들어간 눈부신 꽃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는
그리울 나무
누군가를 마음에 들여놓는 일은 가랑비에 적삼 젖듯 시나브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시나브로가 결사적으로가 되게 하는 존재들이 간혹 있어요. 제인 오스틴의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한 고백처럼요.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시간도, 장소도, 얼굴도, 주고받은 말도,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래 전이야. 한참 지나서야 내가 그러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녀가 주변인에서 주인공이 되는 순간, 빛나는 순간이지요. 옆에 있어도 안 보이는 투명인간에서 온종일 눈에 아른거리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내 인생에도 그런 극적인 반전이 있었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런 순간은 모르는 사이 왔다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기 십상이지요.
책 속에서 변하는 다아시의 마음처럼 나무도 변화하기에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집에 있는 실크 참나무를 보다가 다아시의 힘든 고백까지 연상이 되었어요. 그 나무가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던 때처럼 모든 일이 시작은 시시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때가 제일 좋은 때였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지요. 단지 지나가서 더욱 그러할까요? 어떤 순간, 어떤 시작점은 빛이 나고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첫 만남 첫 대화를 기억하나요. 흠칫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강렬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요. 가식 없는 가면이랄까요… 또 그러면서 처음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 더 멋진 사람이 되어보자는 마음을 먹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