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소녀 둘이 피난길에 올랐다. 6ㆍ25 전쟁이 일어난 후 5개월이 지난 1950년 12월 초순이었다. 그녀들이 보통강(그녀는 대동강을 이렇게 불렀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사람들이 부서진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고 있었다. 뒤틀린 쇠 난간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강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두 소녀는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애만 태웠다. 폭파된 다리를 건너기엔 소녀들은 너무 가녀렸다. 곧 중공군이 밀어닥칠 것이라고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소녀들의 귓전에 맴돌았다.
(폭파된 대동강 철교 모습) 사진: 미군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 그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출처, 한겨레신문
다행히도 두 소녀는 강을 건너가는 작은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들의 뒤로 사람들이 다리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은 등에 짊어진 큰 보따리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두 소녀가 맞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소녀들의 손에 군대 깡통(그녀의 표현, 군용 반합으로 추정)이 들려있었다. 죽은 군인의 품에서 꺼내 온 것이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그럼에도 두 소녀가 내민 깡통에 사람들은 먹을 것을 담아주었다.배불리 먹을 수는 없었지만 소녀들은 이만한 것도 다행이라 여기며 군대 깡통을 소중히 생각했다.
중공군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공군이 다가올수록 피란민의 걸음도 바빠졌다. 명령에 떠밀린 중공군은 빨랐고 죽음에 내몰린 두 소녀의 걸음은 더 빨랐다.
두 소녀는 강원도 춘천과 원주에서 가장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폭격이었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사람의 팔다리가 불탄 나무처럼 나굴었다. 두 소녀는 전쟁이 끝나기만 바랐는데 전쟁이 끝나기 전에 죽을 것만 같았다. 소녀들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죽어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삶이 아득해지고 죽음이 가깝게 느껴졌다. 차라리 길가의 시체가 자신들이기를 바랐다. 그때 허리춤에 단단히 묶어놓은 군대 깡통이 흔들리며 안에 넣어둔 수저 하나가 땡강거렸다. 두 소녀는 다시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두 소녀는 강원도 원주에 정착했다. 한 소녀는 미군 부대 '캠프 롱'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 소녀가 지금 나와 함께 있다.소녀는 굿모닝으로 아침인사를 건네고 아이 러브 유라는 말에는 미투라고 답한다.
캠프 롱(영어: Camp Long)은 강원도 원주시 태장동에 위치한 미국 육군의 주둔지이다. 2010년 6월 4일자로 폐쇄되었다. (위키 미디어)
평안남도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19세 소녀는 이제 89세가 되었다. 군대 깡통으로 구걸을 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끝내 생을 포기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키워냈다.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소녀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떠난 소녀를 떠올리는 남은 소녀의 눈에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요즘 꼬리뼈 쪽에 욕창이 생겨 고생하고 있다. 다행히 호전되는 중이다. 나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소녀가 보았던 무수한 죽음을 생각한다. 어찌할 수 없는 그 죽음과 할머니의 삶을 생각한다. 그 소녀들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디었을까.
며칠 전 할머니에게 내 남은 삶이 한 삼십 년쯤은 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했다. 삼십 년 금방이라고. 허투루 살지 말라고. 그래야 잘 죽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잘 죽는다는 할머니의 말을 오랫동안 떠올렸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