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지나도록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을 찾아서 몇 번 약수터에 갔는데 검은 천막은 굳게 닫혀있었고 천막 입구에는 '불법 건축물, 강제 철거 예정'이라고 적은 흰 종이가 붙어있었다. 녀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2학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였다. 학교에서는 저축 습관을 갖게 한다는 목적으로학생들모두에게 적금을 들게 했다. 돈은 학교에서 관리했고 졸업할 때 찾는 방식이었다. 그날은 육성회비와 적금을 내는 날이었는데 엄마는 육칠 만원의 현금 담은 봉투를 내 가방 깊숙하게 넣어주며 잃어버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무게가 나갈 리 없는 흰 봉투였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나는 학교로 향했다.
삼십 분 정도 걸리는 등굣길 중간쯤 지날 때였다. 짝다리로 서서 바닥에 침을 뱉고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세 명이었는데 한 명은 입에 담배를 물었다. 고등학생 같았다. 나는 벌써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방끈을 붙잡은 손이 떨려왔다. 나는 최대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들 앞을 지나치는데.....
그들이 나를 불렀다.
- 거기 서.
나는 순순히 섰다. 서라니까 섰다.
- 오늘 너네 학교 적금 내는 날이지?
이놈들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계획범죄.
- 아닌데..... 요.
나는 딱 잡아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를 둘러싼 놈들은 내 가방을 탈탈 털고 흰 봉투를 찾아냈다.
- 안 되는... 데.
내 말과 달리 놈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흰 봉투를 들고 홀연히 사라졌다.
억울하고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눈물이 흘렀다. 조금 지나자 감정이 북받쳐 어깨까지 들썩였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재욱아! 인마 왜 질질 짜고 다니냐?
나는 눈물을 훔치며 녀석을 쳐다봤다. 봉만이었다.
- 너,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건데.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 너야말로 무슨 일이냐?
초등학생 때는 서로 키가 비슷했는데 녀석은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 보였다.
사정을 들은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고 학교에 가란 말을 하고 녀석은 어디론가 향했다. 녀석이 사라지자 나는 다시 질질 짜며 터덜터덜 학교로 향했다.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밥 먹을 생각도 없이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 야, 누가 찾아왔어. 너 좀 불러달라던데.
만화 가겟집 아들인 순규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전했다. 순규는 무섭게 생긴 형이라고 덧붙였다.
학교 담벼락 너머에 녀석이 있었다. 나는 학교 안이었고 녀석은 학교 밖이었다. 담 하나의 차이였다. 낮은 벽돌 기둥 사이를 연결한 초록색 쇠로 만든 구조물 사이로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녀석의 손에는 흰 봉투가 들렸다.
- 아니 어떻게? 어디서 찾았어?
- 그놈들이 돈을 조금 썼더라. 몇 천 원 빌 거야.
나는 녀석이 다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녀석의 셔츠 앞섶이 너덜거렸다.
- 그놈들 고등학생 같던데, 싸운 거야?
봉만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몇 마디 하니까 순순히 내놓더라. 잘 지내라.
녀석은 덤덤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나는 봉투 속의 돈부터 헤아렸다. 그러고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녀석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후로 녀석을 볼 수 없었는데 간간이 소식은 들렸다. 무슨 조직에 들어갔다고도 했고 어떤 소문엔 녀석이 소년원에 수감되었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 뒤에 다시 봉만을 만난 것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새까만 얼굴, 찢어진 눈, 다부진 몸, 녀석이었다. 운동복에 슬리퍼 차림은 아니었다. 녀석은 검은색 양복바지에 검은 구두를 신었다. 봉만은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우리였다. 학교로 향하는 124번 버스를 그냥 보낸 나는 녀석과 근처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갔다. 공사장 인부들 몇이 식사 중이었다. 녀석은 순댓국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국밥 주인이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없이 소주잔을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