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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렁이에게 보내는 늦은 사과

자주, 사과는 늦고 사랑해야 할 때는 놓친다.

by 고재욱

나는 닭과의 전쟁 이후 제법 인품을 풍기는 동산 같은 배와 바람에 맞설 정도의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인생 5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내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들에 묶인 검은 염소를 놀리는 일이나 큰 소의 까칠한 혓바닥을 만져보는 일은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모든 게 시들해졌다. 똑같은 모양으로 연결된 논처럼 나의 하루하루도 특별한 일 없이 지루하기만 했다.

견딜 수 없게 심심했다. 가만히 하늘을 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신은 언제나 시험을 주고 또한 그 시험을 통과할 방법을 준비하신다."

작은 교회의 목사님이고, 전도사며, 유치부 선생님인 동네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말이었다. 는 할아버지 말씀을 떠올리며 따분하기만 한 시골생활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료함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봄이 시작되기도 전에 할머니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새벽부터 집을 나선 후에 밥 먹을 시간에만 나타났다. 할아버지 콧수염처럼 생긴 다리 네 개를 바닥에 대고 있는 동그랗고 검은 상 위에 이것저것 먹을 것을 차려놓고 다시 급하게 소매를 걷어붙이며 밖으로 나가기 일쑤였다.

다행히 순하고 다정하기까지 한 두 살 배기, 누렁이가 없었다면 나는 하루의 긴긴 시간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부리나케 점심을 차려놓고 나간 후 누렁이와 마당 곳곳을 뛰어다니던 그때였다. 멀리서 날카롭지만 리듬 있는 그래서 절로 흥이 나는 가위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내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고 그 모습을 올려다보는 누렁이의 눈빛에 왠지 불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pixabay.com

쟁~ 재쟁~

"호바 아악~ 여어엇~"

엿을 파는 손수레 주위엔 벌써 몇 명의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손수레 손잡이 쪽으로 나무로 만든 낮은 테두리를 두른 널찍한 직사각형의 판이 있었는데 그 안에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황금빛 호박엿이 달콤한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그 옆으로 손수레의 뒤쪽, 깊은 짐칸에는 호박엿과 맞바꾼 찌그러진 냄비, 프라이팬, 검정 고무신 등이 뒤엉켜 다급한 아이들의 마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갈대로 만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엿장수 아저씨의 검은 가위가 허공에서 서너 번 회전을 하다가 나무상자 안에 놓인 호박엿을 향해 빠르게 곤두박질치면 호박엿의 가장자리 한쪽이 쩍 소리를 내며 잘려나갔다.

와아!

환호성과 함께 아이들의 입속에 침이 가득 고였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깨갱~ 깨갱~

누렁이는 온몸의 중심을 뒤로하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할머니는 한 손에는 누렁이 목줄을 잡고 한 손엔 빨랫방망이를 든 채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이노무 개새끼! 와 안 허던 짓을 하노. 고무신 어쨌나? 후딱 안 갖고 오나. 물어갈라믄 두 쪽 다 쳐 물고 가지 와 한 쪽씩만 물고 가서 두 개 다 몬쓰 게 만드냐 말이다. 이노무 새끼. 어따 감췄노?"

누렁이는 죽어라 울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빨랫방망이뿐이었다. 간절한 누렁이의 눈빛이 내쪽을 향했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누렁이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제야 진실이 밝혀진다 해서 뭐가 달라질 거냐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엿은 이미 내 뱃속에 있고 누렁이는 실컷 맞을 대로 맞았으니까....


사람이 죄짓고는 편히 못 산다는 옛말은 맞았다. 나는 죄책감에 뒤척이다 새벽 일찍 눈을 떴다. 할머니가 잠에 빠져있음을 확인하고 누렁이에게로 향했다. 온몸을 매타작 당한 누렁이가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누렁이는 그런 일쯤은 벌써 잊었다는 듯이

긴 꼬리를 붕붕거리며 눈웃음을 보냈다. 나는 그런 누렁이의 마음에 감동하고 말았다. 누렁이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깨갱~ 깨갱~~

"이노무 개가 이제 허다하다 솥단지까지 손을 대노. 그래 이참에 된장을 풀자. 손주 줄라꼬 큰 맴 먹고 사 온 소빼를 와 니가 처묵노 말이다. 하이고~ 아주 잘도 발라 처묵어서 빼가 반들반들 허네."

할머니의 손에 들린 소 다리뼈가 높이 오르자 누렁이는 흰자위를 드러내며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나의 배신에도 누렁이는 변함없이 충직했고 나 또한 변함없이 개구쟁이였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한 누렁이는 8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에게 젖을 물리다가도 내가 할머니에게 혼나는 소리가 들리면 새끼들을 뿌리치고 개집 밖으로 나와서 그만하라는 듯이 짖었다. 녀석은 진실한 내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누렁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갑자기 그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날지 몰랐기에. 개장수가 마을에 다녀간 후 누렁이는 사라졌다. 끊어진 목줄만 남긴 채. 다시는 누렁이를 볼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있을 때 녀석에게 말했어야 했다.

"사랑해, 미안해. 누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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