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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Jun 04. 2020

사하라를 걷다

주형원 / 니케북스

생텍쥐페리가 사랑한 땅, 사하라로 저자가 떠난 것처럼, 언젠가 나는 광야로 향했다.

모래의 위엄, 밤, 침묵, 바람과 별의 나라, 그 진정한 풍요로움을 생텍쥐페리가 사막에서 만난 것처럼, 그녀는 시원(始原)의 자유를,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우리 세 사람에게 사막은 풍요와 자유와 기회였고 혹은 삶 그 자체였다. 우리는 비로소 사막에서 불타오를 수 있었다.     

저자는 사하라 사막에서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고 진정한 사랑을 떠올렸다. 작은 먼지로 우주를 떠돌던 돌멩이 하나가 제 몸을 태워 별보다 더 빛날 때, 그 찰나에 떠올리는 간절한 그 무언가가 진정한 소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주 속에서 우리는 작은 먼지에 불과할 것이다. 혹은 먼지보다 작든지. 그런 우리가 별똥별로 빛나는 데 필요한 , 바로 움직임이다. 나를 끝없이 당기는 힘에 반응하는 것. 그 힘에 이끌려 첫발을 내디딜 때 그제야 가속도가 붙고 불타오른다. 별보다 빛나는 별똥별이 된다.


처음 영등포 쪽방촌 골목을 봤을 때 나는 멍한 기분이 들었다. 한 걸음 밖을 향하면 롯데백화점과 멀지 않은 곳에 복합상가 건물인 타임스퀘어가 보였는데, 바로 뒤에 골목은 딴 세상 같았기 때문이다. 전혀 와본 적 없는 원시의 섬! 좌절과 죽음이 붉은 장미처럼 흔하게 피어나는 곳. 나는 우연히 광야로 들어섰다. 하지만 광야를 벗어나고 한참 지나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우연이란 없다는 걸. 먼지에 불과한 나를 강력하게 끌어당긴 힘이 있었다는 것을.


별똥별을 보기 위해서는 주위의 불을 꺼야 한다. 사하라 사막의 짙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후에야 보인다는, 진정한 사랑과 행운을 준다는 두 개의 별똥별처럼 나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의 의미를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진정한 자유로움은 오직 이곳 사막에서만 가질 수 있었다.
모래의 위엄, 밤, 침묵, 바람과 별의 나라는 여기서만 소유할 수 있었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

                                                                                                                                     

간절히 원하는 걸 해야 할 이유가
하지 않아야 할 이유에 묻혀버리는 순간
삶은 팍팍한 사막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렇게 우연이 다가왔다 p24
책속의 정말 멋진 사진들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워요.


나는 사람들이 죽기 전의 모습을 많이 봤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누구나 죽음을 무서워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특히 죽음의 어떤 점을 두려워하는 걸까. 그건 죽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울지, 죽었을 때 그 이후가 어찌 될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일 등이었다. 그런데 몇몇은 죽고 나서 자신의 육체에 일어날 일을 걱정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내가 죽으면 화장은 피해 다오. 너무 뜨거울 것 같거든.” 혹은 “내가 죽었는데 아무도 내 시체를 수습하지 않으면 어쩌지?”같은 내용이었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존재하지 않는 자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할까. 죽은 자에게는 더는 죽음이 없는 법. 고로 죽고 나서는 걱정할 게 없다. 물론 실존적으로 말이다. 종교적으로는 각자의 믿음에 따르시기를.     


두려움도 모래바람과 같다.
몰려오면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이 시련이 부디 지나가기를 바라면서도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다.
등을 돌리고 돌아선다.
대부분의 모래바람은 곧 지나가지만, 어떤 모래바람은 한참 동안 휘몰아치는 경우도 있다.

영혼의 모래바람 p87


오로지 미지의 것만이 인간을 두렵게 한다.
하지만 일단 맞닥뜨리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이 아니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


“괜찮아, 여긴 마라케시야.”   ⓒ주형원


광야를 건넜다고 해서 그 길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몇천만 원의 빚이 남아있었고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싫었다. 살아간다는 일이 지난하게만 느껴졌다. 내 고통에만 잠식되었던 시간.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그들의 것일 뿐. 나와는 상관없다 여겼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와는 다른, 별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몸을 태워 빛을 발하는 사람들. 그 빛으로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이.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었다. 가식일 거로 생각했다. 뭔가 속셈다거나 또 나를 이용하겠지 하고.

산골 마을로 들어간 나는 일하고 있던 야영장 수익이 여의치 않게 되어 다시 떠나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나는 산과 산 사이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한 남자가 내 앞에 차를 세웠다. 시내까지 태워준다며. 양평까지 가며 이런저런 질문이 오갔다.

그는 가끔 내가 봉사를 하던 요양원의 원장이자 교회 목사님이었는데, 교회 안에 내가 지낼 숙소를 제공해주고 양평에 있는 요양보호사 학원에 등록할 수 있도록 비용을 치러주었다. 교회 트럭까지 내주어서 나는 학원 공부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자리를 구해서 떠나는 내게 그는 흰 봉투를 내밀었다. 이십만 원이 들어있었다. 그가 내게 부탁한 것은 딱 한 가지였는데, ‘어디 아프지 마라’였다.

나는 이번에 출간한 책을 들고 목사님을 찾아뵐 생각이다. 기뻐해 주실 것 같다.     


저 살아 있는 별들 가운데에
얼마나 많은 창문이 닫혀 있으며,
얼마나 많은 별이 꺼져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인간이 잠들어 있을까.
서로 만나려고 해야 한다.
들판에서 드문드문 타오르는 이 불빛 가운데
몇몇과 마음이 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     


반짝이는 순간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별처럼 빛나는 존재다.
다만 자신이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같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다른 별을 부러워하며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별 하나만 가지고는 은하수라고 부르지 못하듯,
서로 반짝임을 주고받으며
함께 별 길을 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함께 걷는 삶의 은하수 p109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 줄 때
반짝반짝 빛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서로를 믿으며 알아봐 주는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가며
두려움 없이 삶의 은하수를 걷는 거라고.

함께 걷는 삶의 은하수 p 113


ⓒ주형원


처음에는 시를 썼다. 고3 시절 한 잡지사에 시를 보낸 기억이 있다. 당첨금은 없었지만(책 한 권을 보내주었다.) 지면에 내 글이 인쇄된 느낌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3년 전쯤에 자작시를 쓰는 밴드에 가입했다. 그때부터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한승원, 이형기 시인 등 시 창작으로 시작한 글이 블로그로 옮겨오면서 산문으로 바뀌었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작년 9월부터는 문장이나 문법 등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6월에 첫 책이 출간되었다.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광고 시간입니다. 뿜 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내 속의 참을 수 없는 쓰고 싶은 열정이고 다른 하나는 별똥별 같은 사람들에게 받은 것을 나누고자 함이다. 그게 이제야 알아차린 내 삶의 길인 듯싶다.     


사막 밤하늘에 빼곡히 떠 있는 수많은 별 중에서
나의 별을 찾는 것처럼,
수많은 삶 중 내게 맞는 최고의 삶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만약 찾았다고 할지라도 온전히 그 선택을 책임지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삶을, 내 안의 별을 따라
꾸준하고 끊임없이,
온전히 걸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내 안의 별 p172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맡은 역할을 자각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고
또한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생명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       


사막에는 길 표시가 없다. 하나로 나 있는 길 또한 없다.
모든 방향이 길이 될 수도,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다.
사막에서 길을 잃게 되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
.
하리파는 우리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노랫소리는 별만큼이나 뚜렷하게 우리의 길을 비췄다.
그렇게 우리는 별을 따라 걸었다.
길이 없다는 건,
모든 곳이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막 한복판에서 길을 잃다 p 186, 191     




책을 덮으며 한참을 울었다. 그 이유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눈물을 그치자 저자가 보았던 사막이 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곤 내가 걸어온 삶의 길을 돌아보게 됐다. 이미 지난 발자국은 흔적도 없었다. 이제 나는 앞을 향해 걷는다.

길을 잃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고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별을 보고 걷다 보면 사막의 끝에 다다를 것이고 그 끝에서 또 다른 사막이 시작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그리고 말해주어야겠다. 이미 경험한 사막은 더는 고통도 두려움도 아니란 걸.          


그녀의 책은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 소원 그리고 잃어버린 기도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막 밤하늘에 나타나는 별보다 빛나는 두 개의 별똥별처럼,

오랜 친구처럼.


사하라를 걷다 / 주형원 글 • 그림  / 니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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