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다시 오는 거니까, 봄은
당신이 꽃같이 돌아오면 좋겠다
산책길에 새소리가 들린다. 어디일까. 마른 가지는 아니다. 새는 꼭꼭 숨었다. 잎이 무성한 때는 나뭇잎 사이에, 꽃 뒤에 숨어서 울었는데, 잎사귀 하나 없는 겨울에는 하천 가운데 자리 잡은 억새 떼 속에서 운다. 얼어붙은 물이 차서인지, 흐르는 물결에 흔들려선지, 새 떼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억새처럼 운다.
내가 사는 이곳은 산이고 밭이며 논이었다고 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곳이 ‘혁신도시’로 공포된 후에 산을 깎고 논밭을 메운 땅에는 고층 아파트와 넓고 높은 빌딩들, 국립공원공단, 보훈공단, 산림청, 대한적십자사, 국민건강보험공단,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같은 관공서 건물이 빽빽이 들어섰다. 땅 보상금을 받아 원룸 건물을 지은 이웃 여자는 마치 서울의 귀퉁이 한 곳을 옮겨놓은 것 같다며 느꺼워했다.
점심시간이면 빌딩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도시는 활기를 띤다. 그 기운은 이른 저녁까지 이어진다. 다만 근력이 약하다고 할까. 혁신도시의 지구력은 거기까지다. 밤 9시쯤이면 사람을 보기 힘들다. 거기에 금요일 퇴근길에 끝도 없이 밀려드는 관광버스의 행렬은 쉼 없는 파도 같기도 하고 멀리 두고 온 서울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걸음에는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건물을 옮기면 삶의 터전도 함께 따라올 거라는 예측은 빗나간 듯싶다. 등불을 켜지 않는 아파트가 숭숭 구멍이 난 모습으로 매일 밤 어둠에 물들어간다.
원룸 단지에 세운 주거건물 1층은 상가 자리다. 아래층 통유리에는 각기 다른 부동산 전화번호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수년 전에는 태반이 비었는데, 요즘은 한 집 건너 한 집은 장사를 한다. 닭발, 돼지 발, 각종 발을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 가장 먼저 생겼는데, 얼마 후에 그 옆으로 발 관리를 해준다는 곳이 문을 열었다. 암! 내성 발톱은 미리미리 다듬어야 한다.
국민 간식, 프랜차이즈 치킨집 세 곳이 연달아 개업했고 회, 꼬치, 소고기, 코다리가 간판을 올렸고 마지막으로 돼지 부속 집이 생겼는데, 부속을 부품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카센터라고 생각한 나는 길게 세운 드럼통을 뱅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고서야 그 가게의 간판을 이해했다. 다만 돼지 부속이 어떤 부위인지는 적확하게 말할 수 없다.
한두 집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많지 않았고 도시의 밤은 여전히 스산했다. 아직 '사회적 거리 두기'란 말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곳이 늘어갔다. 이곳은 진작에 2단계 이상의 거리두기가 자연스럽게 시행되고 있었달까.
17평의 목 좋은 건널목 앞 편의점은 급하게 가게를 처분했다. 맞은편에 대형 슈퍼가 생긴 탓이다. 테이블 세 개가 전부인 백반집은 넓은 분식집이 문을 열자 문을 닫았고 분식집은 서너 달 후에 일본어 간판을 내세운 퓨전 일식집으로 바뀌었다.
혁신도시에서 가게를 차리는 사람들은 삼사십 대가 많다. 어린 자녀들이 눈에 띄는데 대여섯 살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내가 사는 곳 근처의 가게에도 아이들이 있다. 엄마, 아빠는 장사하고 아이는 근처에서 논다. 가끔 계산대 옆에 마련한 작은 탁자에서 공책이나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린다. 닭발이나 돼지 발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쓱 지나는 눈길로 대여섯 살 먹은 아이들의 마음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엄마, 아빠와 손을 맞잡은 놀이동산의 풍경이거나 말 안 듣는 동생과의 극적인 화해를 담거나 혹시 산을 그렸던가. 여긴 흔한 배경이 산이니까.
코로나 19로 인해 상가 유리창에 임대라고 써 붙인 종이가 늘어간다. 가게가 문을 닫으면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사라진다.
통유리창 안이 휑하다. 움직이는 거라곤 T.V 속 사람들. 가게 주인은 어디에 있나. 주방 깊숙이, 홀 한쪽에, 계산대 아래에 몸을 숨긴 건가.
집 앞 가게들, 텅 빈 매장 어디에선가 모습을 숨긴 새들이 우는 것 같다.
억새 무리 속에 몸을 숨긴 새들이 주먹만 한 소리로 운다. 길 양쪽으로 서 있는 벚나무에 눈물 한 방울, 딱 그만한 움이 텄다. 몇 달 후면 구름을 배경으로 긴 꽃 터널을 만들 것이다. 그러면 새들은 억새를 떠나 초록 잎사귀 뒤로, 꽃들 사이로 옮겨올 테지. 그때쯤이면 가겟집 아이들은 키 큰 나무와 무성한 잎과 꽃으로 물든 하늘을, 그리고 작은 새들의 노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다시 오는 거니까, 봄은.
♧ 새해, 모쪼록 건강하시고
눈물보다 웃음이, 고통보다 평안이,
구불구불한 인생 가운데에서도,
오늘의 행복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