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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욱 Oct 12. 2021

우연이라는

3. 우연이라는


               

 하늘을 보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한 날은 맑고 너무 예뻐서, 어떤 날은 온통 흐려서 고개를 돌렸다.

 

 노숙인 시설에 입소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말이 없었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세끼 밥은 꼬박꼬박 먹고 있었다. 센터 관계자는 한 가지만 당부했다.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예배가 끝나고 점심을 먹은 후에 교회 옆 골목에 모여 담배를 피웠다. 나는 담배를 살 수 없어서 그곳에 잘 가지 않았는데, 일주일을 같은 방에서 지낸 입소자 한 명이 내 팔을 끌었다. 윤수였다. 그는 30대 초반이라고 했다. 그가 흰 바탕에 파란색 무늬가 있는 THIS 담배 한 개비를 내게 건넸다.

"저, 형이라고 해도 돼요?"

나는 대답 대신 담뱃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에 부딪혔다. 하마터면 기침이 날 뻔했다.

"전 고향이 부산이에요. 초면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몇 년 전부터 노숙 생활을 했는데요, 여러 노숙 센터 중에 여기가 최고예요. 밥도 잘 나오고요, 어지간해서는 나가라는 소리를 않거든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윤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저런 얘기를 쉼 없이 떠들었는데, 녀석에게서 담배 한 개비를 더 얻어 피울 생각에 나는 듣고만 있었다.

 좁은 골목에 노숙인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안개꽃처럼 담벼락 위로 피어나서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급한 배고픔이 해결되자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공짜 밥으로 생을 연명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마포대교를 찾든지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이 삶을 끝내야겠다는 결심을 막 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예배당에 들러서 하나님께 인사라도 해야지'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오전 8시의 예배당은 조용했다. 긴 나무 의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나는 맨 앞쪽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일주일 동안 잘 얻어먹고 간다고, 부디 끝낼 수 있는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짧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발에 뭔가가 툭 차였다. 그건 뜯지도 않은 담배 한 갑이었다. 윤수가 건네던 것보다 200원 비싼 THIS PLUS 담배였다. 나는 정면에 세워둔 십자가를 목을 꺾고 올려다봤다. 바닥에서 천장 바로 아래까지 닿은 H빔으로 만든 철 십자가였다. 십자가 아래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았고, 담배를 찾으러 오는 이도 없었다. 나는 주운 담뱃갑을 손에 쥐고 이 한 갑을 필 동안만 머무르겠다고 기도 내용을 바꿨다. 그러고는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며칠 후 나는 목사님과 입소 기념사진을 찍고 센터에서 실시하는 자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식판을 닦고, 야외 급식소 천막을 치는 일이었다. 무료 급식소를 방문하는 노숙인들의 수는 삼백여 명이었다. 끼니마다 그랬으니 하루에 최소 9백 개의 식판을 닦는 일이었다. 물론 각자의 분야가 정해져 있다. 세제 1, 세제 2, 헹굼 1, 헹굼 2, 그리고 식판 정리 등이다.

밥을 퍼준다든지 반찬 배식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몇십만 원의 급여를 받는 일이었고, 조금의 임시 지급도 해주었다. 나는 다시 윤수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주운 담배가 떨어질 때쯤 나는 THIS PLUS 열 갑을 샀다.          

 

 일한다고 했지만, 식사 시간 전후로 한두 시간 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식사 시간이 아닐 때나 예배가 없는 시간은 따분하기만 했다. 노숙인들끼리 대화가 많지도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경멸하는 듯도 했다. 말다툼이라도 나면 서로에게 '노숙자 새끼'란 말을 서슴없이 했다.          

 한때 나는 그들을 보며 한심하다거나 바보 같은 사람들일 거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노숙인이 될 수 있지?”라고 빈정거렸다.

 막상 노숙인이 되어 만난 노숙인들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퇴직금을 사기당하고 연금까지 압류당한 군 장성이 있었고 고등학교 선생님도 있었다. 이 선생이라는 한 남자는 한석봉이 울고 갈 정도로 한문을 잘 썼다. 그가 물 흐르듯 써 내려간 한문은 아마 아직 교회 복도에 걸려있을 것이다. 어떤 노숙인은 중소기업 사장을 지냈다고 했는데, 사채 업자를 피해서 늘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도 전직을 자랑하지 않았다. 나도 호텔에서 일했다는 걸 발설하지 않았다.          

 

 한 달 식판을 닦고 육십만 원을 받았다. 경비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떠나서 바다를 한 번 본 뒤에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제 떠나자! 센터 덕분에 한동안 편하게 지냈으니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자!     

 사무실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 모퉁이를 도는데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향하던 사람과 꽝하고 부딪혔다. 나는 벽에 손을 짚고 겨우 쓰러지지 않았다.

윤수였다. 녀석이 이마를 비비며 말했다.

"아이고, 아야! 형, 괜찮아요?"

"야, 이마! 그러게 가자기 뒤어나오며 어저냐?"

나는 말하면서 발음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곧이어 입에서 뭔가 주룩 흘러내렸다.

윤수가 소리쳤다.

"어, 형! 입에서 피가 나요."     

 나는 녀석과의 정면충돌로 앞니가 부러졌다. 윤수도, 나도 보행 보험 따위는 들어놓지 않았다. 윤수의 이를 뽑아올 수도, 녀석에게 치료비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 윤수가 가진 거라곤 THIS 담배 서너 갑이 전부였다.     

 죽기로 작정했는데, 앞니가 빠진 몰골이 더 신경 쓰였다. 이빨 값은 한 달 모은 돈으로는 턱도 없었다.


 사무실에서 잘 안다는 치과를 소개해줬다. 부러진 이빨 치료라도 받으라는 것이었다. 여의도에 있는, 옛 한나라당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치과였다. 의사 선생님은 부러진 치아를 갈아내고 옆 치아와 연결할 것이라고 했다. 120만 원 정도 비용이 드는 치료였다. 나는 신용 카드가 있을 리 없는 노숙자였다. 의사 선생님은 매달 갚을 수 있을 만큼 갚으라고 했다. 그것도 기한 없이.

 이빨 값을 다 치를 때까지 시설에 있어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6개월 후에 치료 비용을 다 갚았는데, 나는 홈 리스 센터를 떠나지 않았다.          

 그 후 서울시 노숙인 재활프로그램의 하나로 여의도 공원 청소를 시작했고 급여는 백이십만 원이었다. 그때쯤 나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성경을 완독 했다. 그곳에서 가장 흔한 건 시간과 성경책과 그리고 쓰러진 사람들이었다.

 여전히 변한 건 많지 않았지만, 그쯤부터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제가 여러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세금 덕분이란 걸 압니다. 저는 이 고마움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면을 빌어 인사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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