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LOST STORY 10화

왜? 안 죽어?

독단적인 이해는 누굴 위한 걸까?

by 고재욱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늘, 어렵다. 혹시 희망이 아직 남아있기는 한 걸까?


요양원에서는 어르신들의 잔존기능을 유지하거나 혹은 인지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구연동화 듣기, 생활 체조, 이런저런 봉사자들의 공연 관람, 색종이 접기, 화초 키우기, 붓글씨 등등. 어쨌든 치매노인들에게 유용하다 싶은 내용들을 아직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 제공한다. 물론 그 프로그램에 적합한 대상자를 선정하는 일은 나름대로 배운 지식을 동원했을 터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몇몇 노인들은 적극적인 참여를 하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치매환자들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표정이 밝지는 않다. 왜 그럴까? 사람들의 말처럼 치매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거나 '뭘 알기나 하겠어'란 말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치매환자라고 해서 모든 감정 표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독단적인 이해'가 당연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의례, 그럴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비단 치매환자와 그들을 케어하는 쪽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오늘 한 할머니께서 붓글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참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오셨다. '어, 아직 프로그램이 끝나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하는데 어르신의 목소리가 커졌다. 보청기를 사용하는 분인데 보청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갈수록 잘 들을 수 없다. 자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하기 어렵게 된다. 어르신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커졌다.

왜 안 죽어? 보이지도 않는데 왜? 안 죽어?

어르신의 말씀은 여자 친구의 말처럼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자 친구와 길을 걷다가 여자가 말한다.

"저 여자, 예쁘네."라고 말을 한다. 거기에 남자도 그 말에 동조해서,

"응. 저 여자, 예쁘다."라고 말한다면,

당장 남자의 여자 친구는

"흥, 그러면 저 여자, 따라가 보던가?"라고 말할 것이다. 당연히 남자는 이게 무슨 일인지 황당한 마음이 될 것이고.

여기서 정답은 무엇일까?

궁금하면 500원.... 아니고 아마도 '무슨 소리여~ 자기랑 비교도 안 되는구먼.'이 아닐까?


어르신께서 죽고 싶다는 말의 속내는, '남들 다하는 붓글씨 나도 하고 싶은데, 못 한다 소리 듣고 싶지 않은데, 눈이 보이지 않아서 이렇게 프로그램 방에서 나오게 됐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있는 모습은 보이기 싫다. 정말 속상하다'의 줄임말일 듯싶다.




어떤 분은 침대에 계시고 인지능력이 있는 어르신들은 붓글씨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

어르신은 혼자 긴 소파에 앉아 계속 큰 소리로 왜? 안 죽어?를 반복하신다.

가만히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르신의 보청기를 살핀다. 누군가 보청기를 켜드리지도 않고 귀에 걸었다. 보청기를 켠다.

"어르신?"

"응."

"속상하시죠?"

"속상해. 내가 눈앞에 안개가 뿌예서 잘 보이지도 않고 붓글씨는 쓸 수가 없어. 이런 지경인데 왜 안 죽어?"


잠깐 어떤 말을 해 드려야 되나 생각한다.

그만큼 나이가 드셨잖아요?라고, 혹은 남들도 다 그렇게 늙어가는데 너무 유별나게 그러지 마세요?, 어르신보다 훨씬 아픈 사람도 많으니 그걸 보고 위안받아야죠, 이러면 자녀분들이 속상해할 거예요, 그런 생각 말고 힘내세요(무슨 힘이 남아 있다고?),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할머니의 연세는 87세다. 젊음 쪽에서는 많은 나이고 혹은 본인 쪽에서는 아직 정정해야 할 나이.

아주 오래전에 처음 만난 할머니의 남자는 무척 잘생겼다고 한다.(할머니의 주장이다) 중매로 만났지만 할머니는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나이 19세, 할아버지는 21세. 두 분은 뜨겁게 사랑을 나눴고 1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30을 갓 넘길 때, 뭐가 그리 급했던지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남겨진 삶의 무게는, 책임은, 외로움은 오롯이 할머니가 짊어져야 했다. 할머니의 50년 전의 기억에도 '인물은 좋았지'라는 표현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외모가 남다르지 않았음은 부인할 수 없겠다. 두 분은 구멍가게, 지금의 슈퍼를 운영했었는데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작은 슈퍼는 할머니의 직장이자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멋들어진 남자 하나, 다시 만나지 그랬어요? 왜 그리 오래 혼자 사셨데요?"

당연한 대답을 기대했다. 뭐 일편단심이어야 한다는 둥 애들 때문에 살기 바빴다는 둥.

할머니의 대답이다.

"그러고 싶었지만 누가 나서서 다시 시집가라는 사람이 없었어.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다른 사람 만나지 않을 거라고 미리 말하더라고. 거기다 대고 내가 나서서, 나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그렇게 세월만 흘러갔어."

'독단적인 이해'는 마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혹은 '너를 위해'라는 말로 포장된다.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떤다.

"아이, 그때 제가 있었으면 우리 할머니, 시집보내는 건데요."

"그러게. 자네가 있었으면 나도 시집가서 이렇게 외롭지 않을 텐데."

할머니와 나는 한참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할머니의 눈빛은 푸른 슬픔을 띄고 있었다. 할머니는 붓글씨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못 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신 것이다. 치매노인 대상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분들의 그동안 삶에서의 경쟁과 비교되는 삶이 아직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걸까? 보호자 혹은 홍보를 위해 보여주기 위한 프로그램은 정말 싫다. 인지할 수 없는 분들이야 그렇다 해도 요즘 요양원엔 치매 진단만 받았다 뿐이지 일상생활이 가능한 분들이 아주 많다. 슬픈 현실이고 또한 이해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다들 그러니까.

그 많은 분들은 '강요'를 받는다. 소외될 것을, 조금 떨어져 줄 것을, 더 이상 병원 치료를 받지 말아 줄 것을, 외로워질 것을, 더더 고독해질 것을. 조용히 죽어 줄 것을.

다시 할머니의 소리가 커진다.

왜? 왜 안 죽어?

나는 가만히 할머니 옆에 앉았다.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잘 듣지 못하는 할머니의 귀에 대고 말씀드린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 곁에 있어 드릴게요. 끝까지."

할머니의 머리가 내 어깨로 눕는다.


이 분은 그저 외로운 거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 분은 그저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는 거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 어쩌면 그건 진짜로 돕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내 손길 역시 '독단적인 이해'가 아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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