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일곱 번의 밤 근무가 있다. 요양원의 밤은 낮과 다르다. 낮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혼란스러운 시간이라면 밤은 혼란스러운 기억을 달래는 위로의 시간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깊은 잠에 빠진다. 그렇다고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수면제를 남용하는 것은 아니다. 치매 진단을 받은 후 처방받는 약 중에 수면에 도움을 주는 약 성분이 있을 것이다. 나이트 근무를 시작하는 시간은 밤 9시다. 가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배회라던지 혼잣말을 하는 어르신들도 있지만 요양원의 밤 9시는 거의 고요의 시간, 깨어 있음에 고독한 시간, 어쩌면 어르신들의 고통을 먹고 내가 자라는 시간이다.
CCTV가 내 앞에 있다. 대상자가 잠들었다고 해서 긴장을 풀 수는 없다.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예측 불가한 치매노인들이다. 그들은 갑자기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한다거나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부들거리는 다리로 혼자 화장실로 향한다. 스스로 할 수 없는 몸 상태를 가졌지만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치매환자다. 그 결과는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 옛말에 '벽에 똥칠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다. 기저귀를 착용한 상태에서 자신이 그걸 치워보겠다고 손으로 만지는 것이다. 대변을 보고 그걸 해결해보겠다는 본능은 있는데 몸은 이미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나이트 근무를 할 때 CCTV를 살펴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다. 모니터의 화면은 아홉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화면 한 구역마다 세명에서 네 명의 노인이 잠들었다. 지내온 환경이나 현재의 모습, 삶의 결이 전혀 다른 이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면적 위에 그려진다. 건물을 몇 채 가졌다는 부유한 할아버지, 땅을 일구던 농부, 장성으로 불리던 군인이었거나 치매환자를 돌보던 의사, 우리들을 가르쳤을지도 모를 선생님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평수의 방에, 같은 침대에, 같은 식사와 같은 간식을 먹고, 똑같은 면적 위에서 잠을 청한다. 인생의 마지막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게 보인다.
그럼에도 한 분 한 분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찾아낼 때, 그들은 모두 달랐다. 그들이 전하는 짧은 이야기는 각각의 울림이 있다. 그저 살아온 삶은 없었다. 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꾸밈없이 차근하게 전해질 때 가치 있는 이야기로 남을 것을 믿는다. 나의 삶도 그렇고 당신의 이야기도 그럴 테다.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쩌면 이러한 제각각의 삶이 나를 이곳, 요양원으로 부른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요양원이라고 하면 침묵과 혼란과 슬픔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죽음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 요양원에도 웃음이, 일상의 대화가, 서로를 위하는 배려가 그리고 희망이 있다.
이곳에 100세를 넘긴 두 분의 어르신이 계신다. 그중 조금 어린 102세 할머니는 아직 미혼이시다. 그러니까 102세의 올드미스다. 40여 년 전에 2만 평 규모의 과수원을 홀로 경영하던 분이다. 할머니의 키는 150cm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어르신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허리와 다리가 구부러져서 키가 줄어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할머니는 작은 키에 40kg 정도의 여린 몸이다. 어르신은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에 국민학교, 1년도 다니지 못했다. '여자가 학교는 무슨'이 그 이유였다고 했다. 3남 5녀의 둘째 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장남과 장녀를 제외한 나머지 동생 다섯을 대여섯 살 때부터 보살폈다고 한다. 할머니는 열여섯 되던 해에 동네 이장이 소개해 준 부잣집에 집안일을 하는 식모로 가게 됐다. 그 집에는 자녀 없이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린 소녀가 번 돈은 대부분 동생들을 위해 써야 했다. 그 부잣집에는 할머니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집주인의 눈을 피해 요령을 피울 때 할머니는 집안 구석구석 걸레질을 쉬지 않았고 사람들이 '무슨 충성이냐' 비아냥 거릴 때도 동생들 생각에 쉬지 않고 열심을 다했다고 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본 노부부는 이 소녀를 양녀로 입양했다. 할머니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양부모님의 지원 아래 공부를 시작했고 종래에는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양부모님의 과수원을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할머니의 과수원은 금세 품질 좋은 열매를 생산하는 곳으로 소문이 났다. 처음에 복숭아로 시작한 과수원은 포도, 사과로 재배 종류를 넓혀가며 2만 평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뭘 해도 똑소리 나게 일하던 할머니는 1979년 3월, 봄기운이 만연한 날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농약이 과수원의 소득을 엄청나게 올려줄 거라는 거였다. 농약, 할머니는 그전까지 농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서둘러 농약을 구입했다.
이른 아침 등짐처럼 농약이 든 통을 어깨에 메고 농약을 살포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떨렸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릴 복숭아, 포도, 사과를 생각했다.
할머니가 사용한 농약은 패러쾃(paraquat) 농약이었다. 국내에서는'그라목손'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 농약은 국내에서 2011년 말 재등록이 취소되었고 2012년 11월 말부터 판매가 전면 금지되었다. 유럽연합에서는 2007년도에 패러쾃의 재등록을 취소했고 가까운 일본은 1986년부터 5%로 희석된 패러쾃 농약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망자가 속출한다는 연구발표가 나왔다. (농약과 건강, pesticides.kr)
농약 사용법을 몰랐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이 극독에 가까운 패러쾃 농약을 원액 그대로 사용해버렸다. 할머니의 얼굴에 보호장비는 없었다. 할머니는 이 일로 두 눈을 잃어야 했다.
며칠 전 할머니의 102세 생신날이었다.
"어르신! 이제 100세를 넘겨 102세가 되셨으니 110세까지 가즈아~~ 요."
나는 진심을 담아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드렸다.
보이지 않는 눈을 늘 감고 계시는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흔적만 남은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할머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아, 조용히 해! 누가 백 세야. 왜 남에 나이를 막 늘리고 그래."
잊었다. 여인의 그것도 처녀의 나이를 함부로 발설해선 안된다는 것을.
가끔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어르신이 계신다. 어떤 날은 밝은 기억력으로 먼저 알아봐 주셔서 나를 놀라게 했고 어떤 날은 반갑게 인사를 드리면 "누구냐, 넌?"되물어 나를 당황시키기도 하는 분이다. 어르신께 가끔 농담을 건넬 때가 있다. 어르신을 놀리거나 장난을 치려는 의도가 아니다. 작은 자극을 통해 어르신의 인지 능력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는 나름의 방법이다. 나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르신께 다가간다.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호들갑을 떨며 말한다.
"아이고, 어르신! 이게 얼마만이에요? 한 세 달 만 인가요? 너무 오랜만에 뵙네요."(나는 하루 전날 할머니를 뵈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고 눈을 다섯 번쯤 끔뻑거린다. 그러고는 아래위로 나를 훑어보신다.
"어제 봤잖아, 이놈아! 누굴 바보로 아나."
나보다 두 배 더 세상을 살았다는 것은 두 배 넘는 경험치가 작은 몸 어딘가에 쌓여있다는 것이다. 어르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치매노인분들을 대할 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분들의 삶을 인정해 드리는 거다.
치매라는 병으로 인해 달라진 낯선 성격, 노인이 되어서 생기는 느림, 일제강점기나 전쟁, 혹독하기까지 했을 가난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생긴 고집, 나 또한 늙을 것이고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인정이 그분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양원에도 일상이 있다. 바깥세상과 다르지 않다. 조금 느리고 조금 단순할 뿐이다. 큰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 오늘을 사는 것일 테다.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오늘을 살아간다. 나는 지나버린 어제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보다 오늘이 더 중하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요양원에서의 삶에도 오늘이라는 희망이 남아있다. 요양원의 밤이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