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4월 1일 조선을 강제 점거한 일제는 국가 총동원 법을 공표했다.지원 형식이던 국민 징용은 1944년 강제 징용으로 변한다. 일제 말기에 조선인 군속 동원을 강제적으로 시행하며 전쟁을 위한 노동자 징용은 극에 달했다. 약 70만 명의 한국인이 일제에 강제 연행되었다. 이 중 33만 명은 근로조건이 가장 열악했던 탄광에 배치됐다.
(다케우치 야스토, 조사ㆍ조선인 강제 노동 탄광 편. 사회 평론사)
이때에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들 중에 S할머니 가족도 있었다. S할머니의 나이 대여섯 살 때였다. 할머니의 현재 연세는 82세이다.
요양원 거실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어르신들이었다. 말벗이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우스개 소리를 건넸다.
"할머니! 옛날에 호랑이 보신 적 있으세요?"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하루 종일 말씀을 안 하기 때문에 그냥 던진 질문이었다. 진짜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뜻밖의 대답이 나온다.
"봤지. 그럼..."
"나도 봤지..."
"난 개울 바위에서 봤어..."
호랑이라니... 영화 '봉오동 전투' 도입부에서도 호랑이가 나오는 걸 보면 정말 있긴 있었나 보다. 나는 S할머니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호랑이를 만나기 위해.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우리는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지게 가득 세간살이를 짊어졌고 어머니와 열 살 언니의 손에도 흰 보자기로 감싼 보따리가 들렸다. 식구들의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나는 소풍 가는 아이처럼 폴짝거렸다. 날이 훤하게 밝아왔다. 우리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걷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엄마와 언니의 등에 번갈아 가며 업혀야 했다. 새벽에 출발한 일정은 저녁이 다 돼서야 끝났다.
'노루골'이라고 했다. 노루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었다. 우리는 허름한 집 앞에서 멈췄다. 예전에 화전민이 살았던 집이었다. 멀찍이 집 몇 채가 더 보였지만 모두 빈집이었다. 황토색 벽에는 군데군데 동그란 나무가 박혀있었고 지붕에는 나무껍질이 촘촘하게 올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굴피집이라고 했다. 낡고 오래된 집이었지만 안을 정리하고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나니 당분간 머물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곧 어둠이 내렸고 깊은 산속의 밤은 칠흑의 진한 검정이었다. 가끔 노루의 개 짖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멀리 노루의 작은 두 눈이 떨어지는 별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보름에 한 번씩 아버지는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갔다. 평소에는 혼자 산을 내려갔는데 그날은 어머니와 함께였다. 산골의 밤은 산 아래쪽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리 시작된다. 오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언니와 둘 만 있을 때였다. 찢어진 방문 창호지 사이로 횃불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부는 것인지 횃불이 보였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었다. 언니와 나는 아버지가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와야 할 횃불이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두 개의 불이 어둠 속에서 깜빡거렸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서늘한 빛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것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송아지만 한 크기였다. 이십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은 노란 바탕에 검은 줄이 선명한 호랑이였다. 크고 둥근 얼굴 위쪽에 짧은 귀가 뾰족했다. 호랑이가 눈을 꿈뻑일 때마다 횃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장터에서 본 도깨비 탈바가지 같았다. 호랑이에게서 시작된 가래 끓는 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언니는 나를 붙잡고 뒷걸음질을 쳤다. 숨소리도 낮추고 방문을 닫았지만 녀석이 맘만 먹는다면 허름한 문은 금세 부서질 것 같았다. 잠시 이쪽을 보던 호랑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긴 꼬리가 손인사를 하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아버지는 호랑이가 영물이라고 했다. 산을 지키는 산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호랑이가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 했지만 나는 커다란 두 개의 횃불이 자꾸 생각나 며칠 악몽을 꿔야만 했다. 이후로 집 근처에서 다시 호랑이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번씩 온 산을 흔드는 호랑이의 목소리는 산신이 건재함을 상기시켜주었다.
노루골에 들어온 지 삼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제 그만 산을 내려가 볼 생각이라며 짐 정리가 한참이었다. 나도 그동안 만나지 못한 동무들 생각에 들뜬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산이 되받아치는 울림에 한번 시작된 총소리는 끊기지 않고 산 이곳저곳에 부딪혔다. 아버지는 부리나케 높은 언덕으로 달려갔다. 아래쪽이 훤히 보이는 언덕이었다. 우리는 몸을 낮추고 고개만 빼들고 아래쪽을 살펴봤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이었다. 한복을 입은 사람도 몇이 보였다. 그들 앞쪽에..... 우리 호랑이가 누워있었다. 그때 죽은 듯이 누워있던 녀석이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급하게 뒤로 물러나던 군인들이 긴 소총을 들었다. 다시 몇 발의 총성이 골짜기에 퍼졌다. 그들은 죽은 호랑이를 트럭 뒤에 실었다. 트럭에는 새끼 호랑이 두 마리가 실려있었다.
아버지는 호랑이 덕분에 우리가 일본군에게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호랑이를 위해 기도를 했다. 나와 언니를 잡아먹지 않아서 고맙다고, 우리 가족 대신에 죽게 돼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일 이후로 나는 다시는 호랑이를 볼 수 없었다.
"몇 년을 찾고 찾은 결론은, 바로 일본의 침략이 이 나라의 호랑이 멸종에 깊이깊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해온 이 나라에 많은 일본인이 신식의 연발총과 군총(軍銃)을 들고 밀어닥쳐 메이지 후반(1897~1911년)부터 다이쇼(1912~26년)에 걸쳐서 금세 호랑이를 멸종시켜 버렸다."
<엔도 키미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
영화, 봉오동 전투는 첫 장면에 일본군 장교가 호랑이를 해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의미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단순히 호랑이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의 정신이 호랑이를 닮지 않기를 바랐다. 산신으로 숭배받는 호랑이를 이 땅에서 멸절시키는 것으로 우리의 신을 죽이고 자신들의 지배를 단단하게 뿌리내리려 한 것이다. 호랑이가 우리 신은 아니겠지만말이다.
일본은 우리나라 지도를 토끼로 형상화하면서까지 이 나라를, 대한민국을 깎아내리려 했지만 그들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누르고 짓밟아도 끝내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자신만의 시간으로 그 시절을 견뎌온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의 정신이 멈추지 않고 지금도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
치매환자인 할머니의 기억은 사라져 간다. 할머니의 삶 역시 오래지 않아 마감될 것이다. 내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를 남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 칼바람을 마주하고, 피난민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내 살아낸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질기고 질긴 한 사람의 여정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N포세대라는 말을 들었다. 이삼십 대 젊은 층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 여기에 취업,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세대는 이미 들어온 터였다. 급기야 칠포세대, 인간관계와 희망을 포기하고. 구포세대, 건강과 외모관리까지 나오더니 삶까지 포기하다고 하여 십포세대, 완포세대, 전포세대라 부르고 이를 통합적으로 언론에서 N포세대로 부른다는 것이다.
'옛날에 비해 요즘은 그래도 나은 형편' 따위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바로 꼰대가 될 테니까. 실제로도 그런 생각은 없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말해야겠다. 죽을 것 같은 고통도, 지나고 나면 별 게 아닌 거라고. 당신도 언젠가 미소를 띠며 지금의 힘듦을 옛날 얘기하듯 편하게 말하는 꼰대가 될 것이라고. 할머니처럼 웃으며 호랑이를 그리워하는 날이 꼭 올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힘들어도 삶을 포기하지 마시라고 나는 꼰대처럼 말해본다. 저, 정말 꼰대가 되고 만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