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불 아직 별이 남아있는 시간에 가늘고 긴 칼의 춤이 시작됐다 산 넘어 아침 해도 몸을 숨긴 시간, 옆집 아비는 어린 딸 막아서다 온몸에 붉은 진달래가 피었고 옆집 어미는 두 딸을 서슬 퍼런 거짓말에 바치고 산 중턱 오래된 자작나무에 줄을 걸고 자작자작 타버렸다 뒤란 큰 옹기 속에 작은 소녀는 항아리 가득 찬 숨소리마저 틀어막고 절벽 같은 가슴 감싼 채 시간이 흐르기만 빌고 빌었다 말 못 하는 누런 짐승도 흰 눈동자 뒤집고 바짝 세운 털 사이로 애꿎은 꽃바람만 갈 곳을 찾지 못한 그날, 산 여기저기 소녀들의 낯빛 닮은 꽃들이 피어나서 산 이곳저곳 퍼렇게 붉게 아우성치던 커다란 옹기 속에 작은 소녀가 견뎌낸 그 봄, 흘러내린 눈두덩이 아래 백 아홉 개를 넘긴 주름으로 이 하나 없는 잇몸으로도 기억하는 그날, 그녀가 전하는 그 시절의 피멍 든 산은 고스란히 노인의 몸에 남아서 검은 버섯 꽃을 피웠고 그 마음 다 안다는 듯이 산천은 이 봄에 앳된 소녀들을 잊지 않고 불러내서 천지 간에 꽃불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