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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Walking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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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Mar 27. 2024

걷기 예찬

잘하는 운동도 좋아하는 운동도 딱히 없는 내가 유일하게 자랑하는 게 있다.


“난 걷는 건 자신 있어.”


제일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도, 여행을 떠났을 때도,

걷는 게 너무 좋다.


작년 이맘때 아이와의 갈등으로

권태가 내 마음속에서 기승을 부려

당장이라고 훌쩍 떠나고 싶었을 때,

매일 걸으며 마음을 달랬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부랴부랴

아이 유치원에 하원시키러 가야 하는 입장이라

아침 출근시간을 택했다.

처음엔 마을버스를 놓쳐서 두 번째 버스를 타야 하는 곳까지 어쩔 수 없이 걷게 되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3월의 쌀쌀한 바람마저도

걷다 보면 시원해졌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신선한 아침 공기의 감촉

정류장에 다 와갈 무렵

빈티지한 느낌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커피의 향

모든 게 완벽했다.

아침에 아이 등원준비를 하며 올라왔던

뾰족한 감정들도

걷다 보니 완만해지고 자취를 감췄다.

그 이후로 매일 아침 걸었다.


남편 대신 내가 차를 쓰는 날에도

학교에 주차시켜 놓고 근처 산책로를 걸었다.

엄마 손을 잡고 등교하는 아이들

자기들끼리 장난치며 참새들처럼 몰려가는 아이들

휴대폰에 빨려 들어갈 듯 휴대폰만 보면 걷는 아이들

삼삼오오 무리 지어 걸으며

어제 본 텔레비전 이야기 꽃을 피우는 할머니들

걷다 보면 사람들의 표정이 보여 재밌고

하루하루 변해가는 풍경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오롯이 느꼈다.

그저 걷는 것뿐인데

봄기운에 꽃봉오리가 툭 터지듯

마음속에 즐거움이 툭 툭 터졌다.


지난 주말에는

5월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날씨가 따뜻하고 좋아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

놀이터에서도 놀리고 평소에는 가지 않던 코스로 걸었다. 그러다 아이가 와락 눈물을 쏟아냈다.


“엄마 다리 아파. 더 이상 못 걷겠어.”


겨우 겨우 어르고 달래

가마우지 서식지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걸음수를 확인해 보니

1만 4천보를 걸었다.

아이가 울음을 터트릴만했다.

다시는 오늘 갔던 곳은 안 가겠다고 선포를 하면서도

다행히 엄마랑 산책을 안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편은 출장도 잦고,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매일 붙어있는 아들이 나의 ‘걷기 친구’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확실한 ‘당근’을 주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달콤한 주스나 과자 같은 것들.


때론 아이가 먼저 노을을 보고 싶다며 나가자고 할 때도 있고 엄마가 산책하며 백조를 봤다고 했더니 당장 나가자고 하기도 한다. 물론 백조는 겨울 한정판이다. 얼마 전에 갔더니 백조는 떠나고 없었다. 그래도 아이는 멋진 새를 발견했다며 사진을 찍어두라고 재촉했다.  



요즘은 간식 말고도 아이를 함께 걷게 할 멋진 프로젝트가 생겼다. 바로 발걸음 지도 만들기.

산책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항상 이제 얼마 남았냐고 몇 번을 물었다. 다리가 아파서 그랬겠지. 한두 번은 대답해 주다가 자꾸 그러면 ”이제 그만 좀 물어봐. 저기 집 보이잖아. “라고 매섭게 말이 나왔다.

한 달 전쯤, 아이가 또 물어보길래 불현듯 걸음을 세보면 거리에 대한 개념이 생겨서 좋을 것 같았다. 아이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숫자를 세었다.

집에 돌아와서 스케치북에다가 우리 집을 중심으로 랜드마크를 표시하고 걸음수를 적었다. 그리고 내 걸음 너비를 줄자로 재서 대략적인 거리를 측정했다. 걸으며 숫자를 센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숨도 차고 그냥 걸을 때보다 시간이 1.5배 정도 더 걸리는 듯했다. 그래서 집 주변에 우리가 자주 산책하는 장소들을 구간을 나누어서 재고 있다. 예전에는 이미 다리 아프다는 소리가 나왔어야 할 구간에서도 거리를 측정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겨서 그런지 씩씩하게 잘 걸었다.


방랑벽이 있는 건지 가고 싶은 나라가 많다.

여행을 가면 실컷 그 도시를 걸어 다녀보고 싶다.

어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걷는 게 아니라

그저 아무 목적 없이 걷고 싶다.

그럴 때 그 도시가 온전히 마음에 새겨지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지금은 아이 때문에 제약이 많지만 아이는 자랄 거고

나의 훌륭한 걷기 동반자가 될 것이다.

지금 매주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가는 건

일종의 ‘조기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를 훌륭한 ‘걷는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한

초석이다.


남편과 메시를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날아갈 때

나의 버킷 리스트에 대해서도 얘기했었다.

남편의 낯빛이  일순간 어두워졌었다.


“우리 트래킹 하자. 산티아고 순례길.”


동네 산책도 잘 안 하려는 남편에게

장장 800km에 달하는 길을 걷자고 훅 던진 것이다.

남편은 악마와 거래를 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그 긴 거리를 걷고 또 걸어야만 한다.

6살 난 아들은 아직 이 계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엄마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조기교육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서른 살이 될 무렵부터 내 버킷리스트 1순위에 있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결국에는 떠날 수 있게 되기를.


오늘도 어김없이 또 걷는다. 어느새 봄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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