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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Jan 25. 2024

‘모성애’가 불편한 사람

모성애라는 단어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함, 인자함,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읽힐 그 단어가 나에게는, ‘소리 없는,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페미니즘 같은 철학적 담론의 결과가 아니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통해 나라는 한 사람이 느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결과이다. 엄마가 되는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평가받아왔다. 그 순간순간이 나는 몹시 불편했다. 그 모든 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한 적이 없는 평균 미달이라서 였을까.


임신을 하고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태아에게 장애가 있는지 정밀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혹시 장애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를 낳을지, 포기할지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상상하며 마음이 심란하고 불안해졌다. 실제 주변에 장애가 있다는 걸 알고도 낳아서 키운 분들이 있다.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엄마가 끝까지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과 기쁨이 뒤엉켜있다. 그들의 선택과 삶을 존경하지만, 막상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난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엄마니까, 아이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모성애 때문일까? 아니면 엄마라면 그래야 한다고 각인된 무의식 때문일까?


다행히 운이 좋게도, 나에게 그런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진 않았다. 지금도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다. 내가 처음으로 모성애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거라는 걸 알게 된 건 출산 방식 때문이었다. 이미 한 두 해 전에 출산한 선배맘들은 물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한 친구들은 다양한 출산 방식에 대해 줄줄이 읊었다. 자연분만은 기본값이고, 보다 아이에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체구가 작다 보니 자연분만이 너무 고통스러울 거 같아 애초에 제왕절개를 생각하고 있던 나는 낄 자리가 없었다. 제왕절개라는 옵션도 있다며 넌지시 토론에 참전해 보려 했지만 그건 아이에게 좋지 않으니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는 주류의 의견에 묵살당했다. 그 대화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뱃속의 아이를 위한다면 당연히 엄마가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제왕절개는 엄마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이에게 안 좋은 선택을 하는 거라고 그런 무언의 비난이 느껴졌다. 이미 내 마음속에도 그런 생각이 각인되어 있어서 다른 선택을 하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출산 후에 자신의 분만 과정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웠는지 생생한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도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유도 분만을 하느라 꼬박 하루를 고통받았고 10cm 남짓한 흉터를 얻었음에도 제왕절개를 한 엄마는 어디 가서 출산의 고통을 영광스럽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제왕절개를 해서 그랬을까? 아이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생경하고 낯선 느낌을 쉽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드라마에서는 분만 후 아이를 안을 때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던데, 나에겐 그런 극적인 감동이 없었다. 행여 모성애가 없다고 생각할까 봐 그 뜨뜻 미지근한 첫 만남을 혼자만 간직했다.


산후조리원에서도 나는 마음이 항상 불편했다. 나 같은 I형 인간에게 조리원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미션과도 같았다. 식당에서 한껏 긴장한 채로 누구에게 말을 붙일지 고민하고 망설이고, 이미 무리를 이뤄 승자의 미소를 띤 사람들을 부럽게 바라봤다. 무엇보다 나에게 조리원은 모유왕 선발대회장 같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마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모유량을 늘릴것인가였고, 모유가 가득 찬 젖병을 가져오는 엄마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가  배고파 울 때마다 젖을 물려야만 모유 양도 느는데, 양이 적으니 아이는 수시로 깨서 울며 보채고, 잠을 못 자니까 신경이 예민해졌다. 모유 양이 적은 나는 엄마들과 만날 때마다 위축됐다. 내가 꼭 엄마 자격에 미달되는 것만 같았다. 온 힘을 다해 모유 양을 늘리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마치 모성애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냥 분유 먹이겠다는 말을 속 시원하게 할 수가 없었다.  새벽마다 깨서 젖 물리는 게 힘들어서, 맥주랑 매운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엄마를 위해 편하게 분유를 먹이는 게 마치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누가 직접적으로 엄마라면 이래야지,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초보 엄마가 마주한 세상에는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압박과 금기가 너무나 많았다.


얼마 전에 봤던 육아 관련 영상에서 어떤 전직 초등 교사가 아이의 영상 시청을 잘 통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무분별한 미디어의 위험성은 누구나 안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건, 그 영상에 달린 댓글이었다.

‘oo님은 엄마가 쉬기 위해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주는 걸 하지 말라는 의도 같아요.’

여러 명이 그 댓글에 공감을 표현했다.

그걸 보며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좀 쉬면 안 되나? 왜 엄마가 쉬기 위해 아이를 혼자 놀게 하고 영상을 보여주면 안 되는 거지?’

이런 말을 하면 아이를 방치하고 제대로 돌보지 않는 엄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고작 하루에 몇 십분 정도인데….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와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씻기고 놀아주고 재우고…. 쉴 틈 없이 저녁시간이 흘러간다. 설거지를 할 때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주는 데 종종 약속한 1시간보다 더 보여줄 때가 있다. 아이를 씻기러 가기 전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린다. 주말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아이에게 영상을 틀어주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내가 어릴 때, 일요일 아침이면 항상 7시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고 혼자 디즈니 만화영화를 봤다. 엄마 아빠는 잠들어있는, 고요한 일요일의 아침이었다. 그런 것들은 내 성장에 그렇게 큰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저 지금도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소소한 추억일 뿐이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가끔 너무 과하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모성애의 형태를 획일화해서 이상적인 ‘엄마상’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평균의 종말(토드 로즈 지음)’에 소개된 이상적인 여성의 상징인 ‘노르마 선발대회’를 연상시킨다. ‘노르마’는 클리브랜드의 의사가 수천 건의 자료를 수집해 측정한 여성의 평균적인 체격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르마 선발 대회에 출전한 여성 중 이 평균적인 체격에 완벽하게 부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들쭉날쭉의 법칙, 맥락의 법칙, 경로의 법칙’을 통해 설명한다. 모성애라는 것도 보편적인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 엄마가

된 개별 여성의 특성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닐까.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강점도 모두 들쑥날쑥 다르고, 맥락에 따라 더 잘할 수 있는 역할도 다르고, 아이를 키우는 육아의 과정도 이런 개인의 특성과 철학에 따라 다르게 펼쳐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걸 모두가 인정하게 되면, 아이를 키우는 게 조금은 덜 부담되고 덜 버겁지 않을까? 모성애라는 관념이 만든 평균은 유달리 더 엄격하고 높은 잣대가 요구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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