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체시간에 교육영상이 끝나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책을 꺼내 읽었다.
얼마 뒤 화창한 금요일 오후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대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이야기 소리의 주인공들을 바라보았다.
여자 아이 하나가 말했다.
“엄마 아빠가 죽으면, 네가 잘해야 해,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마음이 무겁고 부담이 된다고 했다. “
옆에 있는 아이가 말했다.
“와, 진짜 네 어깨에 짐이 잔뜩 얹혀 있는 거 같다. 엄마 아빠가 죽으면, 그런 말은 너무 슬퍼.”
첫 번째 아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주변 어른들로부터 끊임없이 “네가 잘해야 한다.” 그런 말을 듣는 모양이었다. 가족 중에서 제일 똘똘한 만큼 기대도 크고, 언젠가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머지가족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듯했다. 뒤이어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우리 누나는 장애가 있어서 아직 5살 같아. 그래서 네가 잘해야 한다, 누나를 돌봐줘야 한다, 그런 말을 자주 들었어. “
무덤덤하게 내뱉는 그 말이 더욱 안쓰러웠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 역시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주변 친척 어른들에게 듣던 말이다.
”네가 아들 몫까지 해야 한다. 네 엄마 아빠가 너 말고 또 누가 있니. 네가 잘해야지. “
당시에는 외동딸이 드물었다. 보통 자녀가 두세 명씩은 있던 시절이었고 장성한 자녀들이 힘을 합쳐 늙은 부모를 모셔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힘을 합칠 형제들이 없었다. 오롯이 나 혼자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래서 13살 무렵 나는 부모님께 1년을 졸랐다.
제발 남동생 하나만 입양하자고.
내가 다 돌봐줄 수 있다고.
그 어린 나이에도, 혼자 그 모든 책임을 짊어질 생각을 하니 많이 두렵고 답답했나 보다.
그 짐을 나눠 들 남동생을 원했던 걸 보면.
정작 부모님은 그런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주변 어른들이 노파심에 던진 그 말들이 족쇄가 되었다. 안정된 직업이 필요했고, 혼자서는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꼭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삶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보다 가족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학연수 대신 영국 Camphill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 그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1년을 더 연장할 생각이었다. 부모님의 허락도 받았고 내가 있던 커뮤니티 측에도 허락을 받고 장애아동들을 돌보는 것과 관련된 자격증 과정도 이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비자 연장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몇 개월 남겨두고, 갑자기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임용시험을 보고 교사가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내 친구들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는 데 혼자만 뒤처지는 것만 같았다. 낙오할까 봐 불안했다. 하루빨리 안정된 직업을 얻어야 한다고, 그리고 결혼도 해야 한다고 나를 다그쳤다.
그리고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아버지가 스위스가 그렇게 좋아보인다며 돈을 보태줄 테니 다녀오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는데도 거절한채 허겁지겁 불안에 쫓겨 귀국했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23살이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서둘러 돌아온 보람도 없이 3년 뒤에나 임용 시험에 합격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리고 뭐든 시도해 보고 조금 돌아와도 될 나이였는데, 그때는 무엇에 그렇게 쫓기고 불안했을까?
내 후배 하나는 내가 바로 앞에서 포기했던 그 나머지 갈림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친구는 미국의 Camphill로 봉사활동을 갔었는데 그곳에서 2년을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미국인 남편을 만났고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며 지내고 있다. 그 친구가 다시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학과 동문의 밤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는 진심으로 그 친구가 부러웠고 그 용기가 대단해 보였다. 그런 내 마음을 그 친구에 표현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도 있었다.
“나도 부모님을 맡길 형제자매가 있었다면, 내가 외동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부모님을 옆에서 돌봐드리고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려야 할 어떤 의무도 부담도 없었더라면, 나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임용시험에서 떨어지고 무척 안타까워하셨던 교수님 한 분이 나에게 대학원 진학을 제안하셨다. 학자를 해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외국의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한다니, 생각만 해도 설렜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나의 발목을 잡았다. 경제적인 부분이 제일 컸고, 대학원을 다니다가 시간만 낭비하고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지 못할까 봐 지레 겁을 먹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함에도 늘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궁금함은 남아있다. 그때 Camphil에 남아있었다면? 그때 교수님 말씀대로 대학원을 진학했다면?
다시 내가 앉아 있던 그 교실로 돌아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목구멍 끝까지,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한 결정을 해.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라는 말이 차올랐지만 갑자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불청객이 될 수는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어느 때보다 부모님의 노고를 깨닫고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녀들은 온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참견꾼들의 불필요한 오지랖과 다르게 우리 부모님 역시 하나뿐인 외동딸과 사위, 손자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충실히 살고 계신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지금도 밭농사를 짓기 위해 한 여름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하러 가시고, 예순을 넘긴 어머니는 농사일은 싫다며 냉동식품 가공 공장에 들어가 고된 일을 묵묵히 견디신다. 그러면서도 일 년에 10번도 넘게 이 모임 저 모임을 통해 국내로 해외로 여행도 다니며 바쁘게 사신다. 그래서 나 역시 새로 생긴 내 가족에게 집중하며 우리 가족의 안전한 보금자리도 마련하고, 노후도 준비할 여력이 생겼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찾아뵙고 일 년에 서너 번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니며 자녀의 도리를 다할 뿐이다.
부모는 부모의 삶을,
자녀는 자녀의 삶을,
각자 충실히 살 때 서로에게 행복을 주고
언제 봐도 편안해서 자꾸 보고 싶은 그런 사이가 되지 않을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
“우리 집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니. 네가 잘해서 우리 식구들 먹여 살려야지. “
이런 말들이 오가는 관계는 결국 모두에게 고통일 뿐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아이에게 짐이 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아이에게 과몰입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아이의 행복만을 바라며 모든 걸 쏟아부어도
결국 돌아오는 건 부모에 대한 원망일 수 있다.
지금의 행복도 포기하고, 노후 준비도 포기하고
아이에게 투자하면서 아이에게 아무런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직접적으로 혹은 은연중으로 계속 아이를 압박하고 통제할 수밖에 없다.
아이를 영유에 보내는 대신 영유 1년 치 비용으로 발리 3달 살기를 계획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유에 가면 제일 좋은 케이는 아이는 행복한 거지만 그 만만치 않은 비용을 대는 부모는 힘이 든다. 제일 안 좋은 케이스는 영유에 가는 아이 역시 불행할 수도 있다. 모든 아이가 영어로만 대화해야 하는 환경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니까.
반대로 발리에 가면 아이도 행복하고 함께 간 엄마도 행복하다! 어떤 지인들은 말한다. 혼자 집에 있는 아빠가 제일 좋은 거 아니냐고. 결과적으로 가족 모두가 행복해진다.
나중에 노인이 되어서라도 아이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 건강하게 늙어갈 준비도 하고 있다.
건강을 챙기고,
사교육비에 많은 돈을 쓰는 대신
매달 노후를 위한 투자에 돈을 쓴다.
종종 친구들을 만나 밤늦게까지 놀다 들어오기도 하고
남편과 단 둘이 1박 2일 여행을 가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함께 할 남편과 친구들이 있고,
돈과 체력이 있다면
아이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할 일은 없을 것이다.